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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Sep 11. 2022

비극이면서도 희극이기에.

인사이드 르윈, 버드맨

희극과 비극이라면 아무래도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우리 인생에 대한 이 통찰은, 어쩌면 희극과 비극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무엇이든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우리의 삶은 그렇기에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인사이드 르윈>과 <버드맨>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다. 희극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순간 저릿한 비극이 되어버리는 두 작품을 살펴보자. 


<인사이드 르윈>은 코엔 형제의 2013년작 영화이다. 이전부터 <위대한 레보스키>,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번 애프터 리딩> 등 블랙 코미디에 두각을 보이던 코엔 형제는 <인사이드 르윈>에서 1960년대 속 한 음악가의 삶을 들여다 본다. 우선 이 영화의 설정은 당시에 실재로 존재하던 소재들과 창작된 요소들을 마구잡이로 섞어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예를 들어 오프닝에서 르윈이 공연하던 ‘gaslight cafe’, 시카고의 ‘the gate of horn’, 심지어 르윈의 친구인 ‘짐 & 진’ 듀오와 트로이 넬슨은 모두 실존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인 르윈 데이비스는 허구이다. (실존 포크 가수의 일생을 각색했다는 관점도 있다.) 여기에서 놀라운 점은, 실존했던 소재에도 깊은 상징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트로이’ 넬슨을 만난 르윈은 트로이 전쟁에 징집되어 방황의 삶을 살게 된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그리고 르윈이 찾아간 ‘gate of horn’은 오디세우스의 부인 페넬로피가 이야기한 ‘gates of horn and ivory’에서 꿈이 현실이 되는 문인 ‘the gate of horn’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실제로 존재했던 소재들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사이드 르윈>의 서술은 현실 고증을 위한 디테일을 활용해 인위성을 전혀 배제한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상징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상징의 핵심이 되는 고양이의 이름을 엔딩 바로 직전에 공개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화를 보며 실화를 보는 듯했던 소재들을 완전히 새로운 상징으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사이드 르윈>이 난해하게 느껴지기 쉬운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인사이드 르윈>이 난해한 또 다른 이유는 오프닝이다. <인사이드 르윈>의 오프닝은 엔딩 시퀀스의 일부를 가져온 장면으로, 르윈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왜 르윈이 노인에게 구타당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관객의 이해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난 후에야 가능하다. 엔딩에서 울려 퍼지는 르윈 데이비스의 <Hang Me, Oh Hang Me>는 관객에게 숨겨진 플롯을 드러내는 신호가 되며, 관객은 그제서야 오프닝의 찝찝함을 떠올려 엔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사이드 르윈>의 연출과 촬영에서 나오는 흡입력을 고려하면, 엔딩 직전까지 오프닝을 의도적으로 기억하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의 엔딩에 도달하는 순간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겪는다. 그 후에는 영화 내내 벌어졌던 오디세우스의 여정이 어떻게 마무리지어지는지 이해하게 된다. 르윈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마치 오프닝에서 과거로 디졸브되는 편집처럼 르윈은 엔딩에서 다시 고양이가 있는 골파인 교수의 집에서 깨어날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도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난을 맴도는 것이다. 


그러나 <인사이드 르윈>이 그저 난해한 영화로 남기에는 너무 아쉽다. 왜냐하면, 우선 영화 자체의 만듦새가 훌륭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뽐낸 코엔 현제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여기에서도 놀랍게 발휘되었는데, 잔잔한 장면에서 갑작스럽게 기차 소리를 삽입하는 J컷은 영화 전제의 텐션이 떨어질 때 갑작스럽게 등장해 관객과 작중 인물을 동시에 압도시킨다. 또한 <아멜리에>나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에서 능력을 선보인 촬영감독 브루노 델보넬은 <인사이드 르윈>에서 그 잠재력을 완벽히 발산한다. 조명의 활용과 질감의 조절, 그리고 전반적인 이미지를 지배하는 뿌연 톤은 너무 차갑지도 않으면서 불확실한 르윈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도 하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난해하지만은 않은 영화인 이유는, 이 영화는 난해한 동시에 훌륭한 코미디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 중간중간 인물들의 대사는 영락없이 웃긴 코미디의 기능을 한다. 골파인 교수의 아내가 르윈에게 고양이를 들이밀며 “고환은 어딨냐”며 소리지르는 장면이나, 시카고로 가는 중 롤랜드 터너와 지팡이, 아담 드라이버 역의 알 코디가 부르는 “outer space” 코러스, 진이 르윈에게 말하는 ‘이중 콘돔’ 대사 등등 이 영화에는 코미디스러운 순간들이 넘쳐난다. 허나 <인사이드 르윈>는 코미디도, 심지어는 블랙 코미디라고 할 수도 없을 듯 하다. 대체 왜, 혹은 어떻게 <인사이드 르윈>은 희극에서 비극으로 변모하는 것일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2014년작 <버드맨>은 작중 슈퍼히어로 영화인 ‘버드맨’ 시리즈로 유명세를 떨쳤던 배우 리건 톰슨이 망가진 자신의 삶을 이끌고 연극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리건은 사랑하는 애인과 이혼했고, 딸은 자신을 경멸하며, 재수없는 동료는 자신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으려 하고, 평론가는 ‘딴따라’에 지나지 않는 리건의 연극을 죽이려 한다. 심지어 딸에게 물려줄 주택도 연극을 위해 내놓아야 했고, 연극 도중 문이 닫혀 속옷 차림으로 타임 스퀘어를 뚫고 객석으로 등장해야 했던 일로 대중의 놀림감이 되었다. 리건은 자신이 애정하던 딸에게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삶을 부정당했고, 전 부인 앞에선 자신의 자살 시도를 고백하며, 평론가가 참석하는 연극 당일 실제 권총으로 자살을 계획한다. 


<버드맨>은 이러한 리건의 삶을 더 깊이 비추기 위해 영화 전체를 하나의 쇼트로 구성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로프>에서부터 내려오던 이 테크닉은 엠마누엘 루베즈키에 의해 완벽하게 실현되었고, 그덕에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단 한번의 쉴 틈도 없이 리건의 삶을 목도해야만 한다. 


그러나 <버드맨>은 두 시간 가량의 러닝타임 내내 재치와 리듬감으로 채워져 있다. 김치 냄새가 나는 꽃, 우스꽝스러운 리건과 마이크의 싸움, 정신없는 기자 회담 속 “버드맨 4”를 외치는 중국인 기자, 속옷 바람으로 극장 정문까지 돌아가는 리건에게 사인 좀 해달라는 행인. 이 외에도 <버드맨>이 가지고 있는 코미디적 요소는 넘쳐난다. 대화의 작법이나 호흡도 펀치라인을 위한 빌드업과 같이 코미디에서 자주 활용되는 방식이 차용되었고, 영화 전반을 주무르는 재즈 드럼은 쏟아지는 인물들의 대사가 재즈 음악의 가사로 기능하게 하듯이 리듬감을 부여한다. 이 리듬감이 매섭게 쏴붙이는 이 영화의 화법에 관객이 지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되며, 언제 몰입하고 언제 웃어야 될지에 대한 힌트도 된다. 


특이하게도 영화의 내용은 비극적이지만 그 작법은 매우 희극적인 <버드맨>의 방향은 결말에서 드러난다. 리건은 병원에서 사라지고, 리건의 딸 샘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꺼내 위로 쳐다보며 웃음을 짓는 것이 이 영화의 엔딩이다. 멀리서 가볍게 보면, 이는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창문 아래가 아닌 위를 바라보았다는 것은 리건이 떨어지지 않고 날아올랐다는 이야기이며, 그 수많은 고난을 뚫고 숙명을 다한 뒤 숭고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리건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버드맨>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두 가지, ‘추락’과 ‘비행’은 동일 선상에 놓인다. 리건 톰슨의 커리어는 버드맨(비행)의 마지막 시리즈에서 실패(추락)하게 된다. 환영 속 버드맨이 되어 시내를 날아다니는(비행) 상상은 지붕 위에서 떨어져 자살(추락)하려는 행위와 같다. 카메라 또한 고개를 위로 올리는 틸트 업(비행)과 반대인 틸트 다운(추락)을 섞어가며 리건의 시간대를 점프한다. 계속해서 영화는 비행과 추락이 같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엔딩에서 샘이 창문 위를 쳐다보든 아래를 쳐다보든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차피 비행은 추락과 같기에 어떻게 보든 리건은 자살한 것이다. 특히나, 리건이 비행했다고 이야기하는 영화의 연출은 리건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킨다. 리건이 연극을 만든 이유는 대중에게서 버드맨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총을 쏜 뒤 깨어나 보는 자신의 모습은 버드맨과 닮아있었고, 이제는 저신이 좋아하는 꽃을 받아도 향을 맡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결국 리건은 버드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네 그의 삶은 버드맨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버드맨으로서의 비행은 곧 리건으로서의 추락이다. 걸핏 보아선 해피엔딩같던 영화가 한순간에 가장 비극적으로 치닫는다. <버드맨>은 대체 왜, 어떻게 비극을 희극처럼 만들어 놓았을까. 


<인사이드 르윈>이나 <버드맨>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모두 하나의 단순한 접근으로 대답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초반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이 말은, 결국 마냥 희극인 삶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타인의 삶을 보았을 때 희극이라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깊은 고민과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고, 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맞닥뜨리기도 하며, 갑자기 찾아오는 불행과 우울에 휩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너무 가까이만 보고있기 때문이다. 살짝 떨어져서 보면 거기에는 재치와 코미디로 가득찬 순간들이 넘쳐난다. 마치 <인사이드 르윈>과 <버드맨>같이. 이 점에서 두 영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살짝 진부할 수 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강력한 한마디이다. 희극인 것 같은 우리의 삶도 비극이며, 비극인 것 같은 우리의 인생도 희극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둘을 진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섭리임을. 


헷갈려서는 안 되는 점은, 그 둘 모두 정답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다. 그와 동시에 희극이기도 비극이기도 하다. <인사이드 르윈>이나 <버드맨>이 그런 것처럼. 그러므로 이 영화들을 희극으로 보는 시각도 중요하고, 비극으로 보는 시각도 중요하다. 둘 중 하나만이 정답일 수는 없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2042568/mediaviewer/rm1702481153?ref_=ttmi_mi_all_sf_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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