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물든 하늘 아래 나 혼자

1. 혼자 살기, 고요함에 익숙해지기

by 조니워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 나는 혼자 살아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홀로 꿋꿋이 살게 될 새로운 집.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들어온 거라 바로 며칠 전에잠깐 들러서 봤던 집인데도, 오늘 다시 보니 새로운 기분이었다.


포장이사를 했기에 대부분의 짐은 제 자리에 두셨지만, 문제는 책이었다. 책은 나만의 꽂는 순서와 방법이 있었기 때문에 이사할 때마다 늘 내가 직접 꽂았었다.


"사모님, 서재가 이쪽이시라고요? 책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책장만 여기랑 여기에 나란히 둬주시고 책은 그 앞에 쭉 쌓아주세요. 제가 정리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다소 밝은 목소리로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하시는 직원분을 보니 솔직한 분이시구나 싶었다.

하긴, "책들도 모두 제가 원하는 대로 다 꽂아놓고 가주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나도 책이 많지 않았다면 내가 지불한 포장이사 금액에 대한 권리이니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지만, 책 3,000권을 순서대로 다 꽂아달라고 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삿짐 트럭이 떠나고, 바로 가전제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격이 급한 편이라 이번 주말에 90% 이상 짐 정리를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대형가전이 준비가 되어야 했다.

세탁기, 건조기, 70인치 티비, 4도어 냉장고까지.

누가 봐도 혼자 자취하는 사람의 가전 라인업은 아니었다.


하긴 나를 자취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기엔 표현이 부족해 보인다. 나는 이제부터 아마도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영원히 혼자 살아갈 1인 가구이니, 영원히 자취할 예정입니다 라고 말해야 하나.

완전히 혼자 평생 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거니, 이 정도 가전은 당연히 갖춰야 하지 않나! 하고 스스로 소비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냉장고를 설치해주러 온 기사분께서 주방 베란다로 가시더니, 창 밖 풍경을 보며 감탄하신다.


"와! 경치가 정말 좋네요. 좋은 곳으로 이사 오셨어요."


친절한 기사님의 립서비스였을 수 있지만,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이삿짐센터의 이모님도 집이 너무 좋다며 덕담을 해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칭찬은 늘 아끼지 말아야 하나 보다.

그 말을 듣고 나도 한 번 더 창 밖을 바라봤다.

예쁘게 단풍이 물들어 있었고, 하늘은 파랬다. 그와 살던 집에서 나올 때 봤던 그 하늘이었다.

그는 지금 내가 없는 그 집에서 혼자 그 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 이런 생각도 이젠 하지 말아야지.



언니가 하루 종일 옆에 있어주느라 고생해서 저녁으로 돈카츠를 배달시켜 먹었다. 맛은 그냥 평범했는데, 오늘 먹은 첫 끼니라서 맛있게 느껴졌다.

아직 짐 정리가 다 안 끝난 상황이라 자고 갈 집 상태가 아니기도 하고, 언니도 집 밖에서 자는 걸 좋아하지 않아 저녁 7시쯤 돌아간다고 했다.


"오늘 고마워, 언니. 조심히 들어가."


"응, 너도 짐 정리는 내일하고 쉬어. 오늘 고생했다."


끼익, 철컹.


현관문이 닫히고, 순간 고요함이 나를 감쌌다.


이 지구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행히 이웃의 TV 소리와 윗집의 발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발 망치 소리가 반가울 줄이야.

이렇게 적막함 속에 계속 있다간 쓸데없는 생각에 잠길 것 같아서 서둘러 TV를 켰다. 나에겐 언니가 스마트TV에 세팅해주고 간 넷플릭스와 웨이브, 티빙 3종 세트가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하나 틀어놓으니 이제야 집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이래서 자취하는 사람들이 구독 서비스를 끊지 못하는 건가.


첫날은 안방과 거실만 깨끗이 비워놓고 잠을 청했다. 매트리스와 이불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텅 빈 침실. 드레스룸을 따로 뒀더니 방이 너무 텅 비어있다. 내일은 안방에 놓을 스탠드 조명이라도 하나 사야겠단 생각을 했다.

새로 산 매트리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사하면서 하고 싶던 로망 중 하나인 실링팬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가을이라 저걸 사용하는 건 내년 5월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기대대로 예쁘게 달려서 기분이 좋다.


하루 종일 피곤했던 하루라 잠이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영 잠이 오질 않는다.

이유는 알고 있다. 이혼 후에도 늘 같이 침대에 누워 자던 남편도, 그릉그릉 소리를 내며 내 머리맡에서 잠들던 고양이들도 이제 없다.

유독 텅 빈 방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안고 잘 여분의 베개라도 가져올걸 하고 뒤늦은 후회도 들었다. 그렇게 뒤척이면서 1시간가량 지난 것 같았다.


"진짜 혼자네..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거야."


아무도 듣지 않을 말을 혼자 입으로 뱉어봤다.



주말 내내 짐 정리를 하고 3일 만에 출근했더니 이사 잘하고 왔냐고 동료들이 관심을 보인다. 역시 이사는 할 게 아니라며, 이번엔 정말 오래 살아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에 이사하고 올해 또 이사한다니까, 다들 기겁을 했다. 심지어 전월세도 아니고 매매인데 1년에 한 번씩 이사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번에는 회사랑 가까운 곳으로 왔으니 집들이를 하라길래 당연히 그러겠다고 웃어 보였다.


이사 후 첫 출근일, 평소보다 조금 늦게 퇴근했으나 어차피 나의 퇴근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제 집에 없다. '오늘 늦어요. 먼저 저녁 먹어요'라고 톡을 보내 놓을 남편도 이제는 없다.


늦는다고 보고할 사람이 없으니 홀가분하네 하며 지난주와 다른, 그러나 앞으로 쭉 오게 될 경로를 따라 집에 돌아왔다.

사실 돌아왔다 라는 말이 아직 낯설다. 내가 돌아가던 집은 이 집이 아니었으니까.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기다려주는 예쁜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고, 남편이 함께 사는 안전하고 쾌적한 우리 집이 내가 돌아갈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 내가 돌아온 길은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불편한, 그래도 회사와의 거리는 더 가까워진 곳이었다.


'출퇴근 시간은 확실히 줄었네. 잘 골랐네.'

라며 스스로 대견해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단점은 애써 무시한 채.


띠띠띠띠 띠리링-


도어록을 열고 들어가니 적막함만이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말에 귀가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올 때 앞으로도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어서 순간 심장 한편이 욱신거렸다.



혼자 있는 시간을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꽤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내게 언제든 돌아갈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누리는 자유에서 온 거였다.


이제는 돌아갈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고양이들도 없이 강제로 무한하게 누리게 될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이다.


그 둘의 차이가 이렇게나 크구나.

나는 나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환경과 상황이 변하니 내가 알던 나의 모습도 한결같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분명 익숙해지고 무던해지는 순간이 올 거란 걸 알고 있다.


그때까지는 차라리 이 적막함과 쓸쓸함을 즐겨봐야겠다.

가끔은 자기 연민에도 마음껏 빠져보자.


먼 훗날, 아니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그때 그랬나? 지금은 너무 좋은데.' 하며 이 순간을 추억할 날도 올 테니까.



단지 안의 단풍이 곱게 물들어있었다. 좋은 경치가 이 집을 고른 큰 이유 중 하나였는데, 역시 탁월했다.



*총 30화로 계획 중입니다. (1부 15화, 2부 15화)

*1부는 브런치북으로 발행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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