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를 달았다, 전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2. 나처럼 그 역시 혼자 견뎌내는 중

by 조니워커


이사 후 일주일쯤 되었을까. 퇴근 후 집에 오니 주문했던 블라인드가 도착해 있었다.


생각보다 큰 6개의 박스를 보고 1차 충격.

들어보니 생각보다 너무 무거워서 2차 충격.

그게 그중 가장 작은 박스였다는 게 3차 충격.


하지만 이제 난 무거운 짐을 스스로 옮겨야 하는 1인 가구다.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서 한쪽을 들어 올린 후 의자에 기대고, 집 안으로 밀어 넣은 후 다른 반대쪽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6개의 블라인드를 집에 넣은 것만으로도 퇴근 후 얼마 남아있지 않던 체력이 소진되는 기분이었다.

‘요즘 이사한다고 운동을 안 했더니 티가 나네.. 운동해야겠다.’

지켜질지 모를 다짐을 속으로만 해봤다.


저녁을 먹고 다시 에너지가 생기니까 떨어졌던 체력도 조금 살아났는지 블라인드를 달아보고 싶어졌다. 하나만 시험 삼아 달아 보려고 박스를 뜯었다. 못 없이 설치할 수 있는 부품을 샀는데 처음 사용해 보는 거라 방법을 잘 모르겠었다.


그와 함께 살 때는 집에 설치할 게 있으면 모두 그가 해줬었다. 나는 설치 외의 모든 일을 했다. 구매 전 치수를 재고, 디자인을 고르고, 가격비교를 하고, 쿠폰과 할인카드까지 적용해서 구매하는 단계까지 담당했다. 각자 잘하는 일을 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업무 분담이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분담할 업무 따위는 없다. 모든 건 스스로 해내야 한다.


다시 한번 사용 설명서를 보니 생각보다 쉽게 조립할 수 있었다. 하나가 성공하자 의기양양해진 기분이었다. 이제 부품에 블라인드만 끼우면 설치 완료다.

자신만만하게 창가로 가서 엊그제 산 사다리를 밟고 올라섰는데..

아차!!

사다리 위에 올라서도 높이가 안 닿는다. 내 키가 작다는 걸 잊고 있었다. 3단짜리 사다리가 아니라 4단짜리를 사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사다리의 구매 결정도 끝낸 상태이다. 어떻게든 까치발을 최대한 들고 낑낑 대며 설치를 해봤다.

“으으.. 아악! 으라차!”

어차피 집 안에 나밖에 없으니 소리를 지르며 힘을 모아 블라인드를 창틀 부품에 고정시켰다.


제일 크고 무거운 블라인드를 성공하고 보니 다른 것도 해치우고 싶었고, 약 한 시간 반에 걸쳐 거실 큰 창과 작은 방 창에 모두 설치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살 때는 내가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남편에 비해 힘이 약했으니 서로 일을 나눴던 거였고, 힘쓰는 걸 못하는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힘을 내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 하나를 해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오늘 난 삶을 살아가는 데 새로운 기술 하나를 추가했다.



블라인드 설치를 마치고 나니 밤 11시였다. 후다닥 뒷정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으려던 찰나, 전화가 울렸다.


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순간 심장이 쿵하고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 나야.”


여전히 나를 여보라고 부르는 그. 정말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응.”


“집이에요?”


“응. 집이에요.”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 어이없을 수 있는데..

혹시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가 뭐였지?”


생각도 못한 이유였다.


“응? 비밀번호? 당신이랑 내 생일 붙여서 만든 번호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눌렀는데 안 열려서.. 한 번 더 틀리면 잠길 것 같아서 못하고 있네. 일단 한 번 더 해볼게.”


띠띠띠띠 띠띠띠띠 띠리링

전화기 너머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열렸다. 아까 왜 안 열렸지. 미안해요, 이런 걸로 전화해서.”


스스로도 어이없다 싶었는지 허탈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지. ..늦게 퇴근했네?”


“응, 그렇지 뭐. 자기는.. 좀 어때요? 잘 지내요? 밥은 잘 챙겨 먹었고?”


“..응. 잘 지내요. 밥도 잘 먹었고. 당신은?”


“응.. 나도.. 회사에서 밥 잘 먹고 있어.”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던 듯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내가 먼저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기엔, 나 역시 그런 말은 쉽게 나오질 않았다.


“…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요. 피곤할 텐데 얼른 쉬어요.”


그가 망설이다 말을 꺼낸다.


“응. 당신도 늦게 퇴근해서 피곤하겠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나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통화를 마쳤다.



통화 종료를 누른 뒤, 눈가가 잠시 뜨거워졌다.

이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여전한 그의 모습에 안쓰럽기도 하고, 집에서 외롭게 기다리고 있었을 고양이들이 안타깝기도 했다.

현관 비밀번호를 깜빡할 정도로 정신을 놓고 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나보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예상한 대로 헤어진 뒤 아마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를 동정할 이유도 사실 나에겐 없다.

그렇지만 함께 보낸 7년의 시간이 이 애잔한 마음을 가져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블라인드를 혼자 달 수 있게 된 날, 그는 현관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 둘은 이미 각자 견뎌가며 어떻게든 서로가 없는 삶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블라인드 길이를 잘못재서 아래쪽이 좀 부족하다. 치수는 여유있게 주문해야 한다는 교훈을 이렇게 또 얻는다.



*총 30화로 계획 중입니다. (1부 15화, 2부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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