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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워커 Jan 04. 2023

태어나 처음 마이너스 통장 개설한 썰

4.달콤한 첫 만남, 구질구질한 20개월


집을 매매해서 자취를 시작했다는 건 전월세와 달리 이 집에 오래 살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돈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이사를 자주 다니기 싫다는 의지. (실제로 돈 많은 부자들은 월세로 산다고 하더라.)


J는 최근 7년 간 5번 이상 이사를 해서, 더 이상의 이사는 지긋지긋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살 때 이사, 그로부터 반년 뒤 결혼하며 이사, 시부모님 명의의 집에서 나가느라 이사, 이사 간 집이 너무 사생활이 노출되는 저층이라 이사, 이제 진짜 오래 살아야지 하면서 매매한 신축아파트에서 남편의 외도로 인해 이혼하면서 이사.

사주를 보면 분명 역마살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 빈도였다. 그래서 이번 집으로 이사하며 최소 5년은 살아야지 생각하며 집을 매매했던 거다.


이때 돈이란 돈은 다 끌어다 쓰는, 소위 영끌을 하다 보니 당연히 가전제품과 가구를 살 돈이 없었다. 하지만 오래 살 집인데 가전과 가구 없이 덩그러니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수가전이라 불리는 냉장고, 세탁기, TV뿐만 아니라 건조기, 청소기, 침대, 소파, 식탁 등등. 사야 할 물건은 많고 돈은 없는 상황이었으니, 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며 신중하게 구매 스케줄을 짰다.


J는 일단 필수 가전은 사야 한다고 생각했다.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TV는 이사하는 당일에 들여놓아야 하니까 미리 구매해놓기로 한다.


'4개를 모두 사려면 최소 300만 원 이상 들겠네...'


쇼핑몰 사이트를 전전하다가 당근마켓과 중고나라를 뒤지기 시작했다. 새 제품은 100만 원 정도 하는데, 당근마켓에서 보니 박스미개봉 새 제품은 70만 원대, 사용한 지 몇 개월 된 제품은 50만 원 미만으로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전제품을 중고로 사는 것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일시불로 현금 목돈이 바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부담스러웠다. 미개봉이더라도 중고 시장에서 현금으로 20만 원 정도 저렴하게 구매하는 게 새 제품을 사는 것보다 더 이익인지도 확신이 없었다. 당근마켓 알람이 오면 바로 들어가서 가격과 제품을 본 뒤 관심물품에 저장만 해놓고 고민하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절망 속에서도 빛은 있다고 했던가.

마침 J가 이사를 준비하던 때가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한창 하며 여러 쇼핑몰에서 쿠폰과 무이자할부를 뿌려대던 시기였다. 3개월 무이자할부 따위가 아니라, 무려 20개월/30개월 무이자 할부라니!

무이자할부를 적용하면 중고로 사는 것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금전적/비금전적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J의 마음은 요동쳤다.


'그래.. 어차피 한 번 사면 10년 쓰는 대형가전이니 새 제품으로 사는 게 좋지. 게다가 20개월 할부면 한 달에 5~7만 원 정도니까 전혀 부담스럽지 않잖아? 이게 더 합리적인 소비라고.'




문득 생각해보면 J가 가장 처음 해본 할부(?)는 학자금 대출이었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대학을 가게 되면 무조건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국립대를 지원해봤지만 성적이 부족해서 떨어졌다.

비싼 학자금 대출은 대학 재학 중엔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졸업하자마자 그녀를 덮쳐왔다. 애초에 사회에 나오자마자 1개월의 유예기간도 없이 학자금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정부가 야속하기도 했다. (요즘은 바로 취업하지 않거나 휴학을 하는 경우도 많아 대출상환에 유예기간도 준다고 하던데, J가 졸업할 무렵엔 그런 제도가 없었다. 아마 있었는데 J가 몰랐었을 수도 있다.)

재학 중 몇 번의 장학금을 받은 덕분에 갚아야 할 학자금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모아놓고 보니 졸업 후 갚을 돈이 1500만 원이 넘는 큰돈이었다. 학자금 대출 전액을 다 갚는데만 4년 정도가 걸렸고,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당연히도 저축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장기 할부가 가져오는 무거운 후폭풍을 몸소 겪어놓고서도 J는 그때의 기억을 이미 지워버린 후다.




무이자할부를 길게 주는 사이트를 골라서 망설임 없이 결제를 진행했다. 카드를 긁는 그 순간 J의 마음 안에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생겨났다.

오랜 고민을 끝내고 결정했다는 후련함.

큰돈을 쓰는 두려움.

꼭 필요한 소비였다며 합리화하는 뻔뻔함.

새 제품을 구매한 것에 대한 설렘.

20개월이나 안고 갈 빚에 대한 작은 찜찜함까지.

소비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깨닫기에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형 가전과 소형 가전, 필수 가구를 줄줄이 구매하기를 1~2개월. 그 기간 동안 J의 취미는 찜하기, 장바구니 넣기, 제품스펙 비교하기, 줄자를 들고 집 곳곳의 치수 재기였다. 좋아하던 책 읽기도 그 기간에는 아예 하지 않았다. 인간이 상품만 끝없이 보고 또 봐도 정말 재밌다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었고, 이렇게 쇼핑중독증이 생기는구나 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J의 쇼핑 중독이 멈출 수 있었던 건 1개월 뒤 카드 명세서를 받아 든 뒤였다.


"....500만원..?"


그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50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혹시 뭔가 잘못 결제된 건 아닌가 싶어 사용 내역을 모두 확인했으나, 모두 그녀가 신나게 긁은 금액이 맞았다.

취득세를 6개월 할부로 냈던 금액까지 합쳐지니 500만 원이 넘는 돈이 카드값으로 나가게 되었던 거다.

한 달에 각각 5만 원, 7만 원, 10만 원 정도 밖에 안되네 하며 무이자할부로 산 것들도 그 할부가 합쳐지니 할부 내역만 월 50만 원은 되었다.


최소한 취득세가 나가는 6개월 간은 이 어마어마한 카드값을 감당해야 한다. 물론 이사를 한 초기를 제외하곤 소비가 당연히 줄겠지만, 어쨌든 평소 지출보다 큰돈이 매 월 나가게 되는 상황이다.


J는 급하게 모든 통장을 확인하며 잔고를 체크했다.


"아.. 망했네."


J가 가진 돈은 남은 6개월을 버틸 수 없었다. 돈을 구해야 한다.




회사에서 매 월 들어오는 작고 소중한 월급 외의 소득이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3가지다.

급하게 다른 부업을 하든가, 부모님한테 손을 벌리든가, 아니면 비상금 대출을 받든가.


첫 번째 방법은 본업도 바빠서 매일 야근하고 주말출근하는 시기라서 애초에 무리였다. 진작 N잡러가 되어 있을 걸, 근로소득 외에 다른 소득이 있으면 좋았을걸, 이제 와서 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후회가 그녀를 덮쳤다.


부모님한테 빌리는 방법이 가장 쉽고 빠르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이혼하고 혼자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에 부모님의 모든 관심은 지금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고,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티를 내는 순간 왜 그놈에게서 위자료를 넉넉히 받지 않았느냐, 왜 네가 그 부담을 지고 있냐며 속상해하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J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이혼 시 재산분할을 얼마를 받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는데, 분명 그녀가 받은 돈 보다 더 받았을 거라 짐작하시는 것 같아서였다.


남은 방법은 비상금 대출, 즉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는 방법이었다.

J는 태어나서 한 번도 마이너스 통장을 써본 적이 없다. 학자금 대출과 주택담보 대출을 제외하곤 부채를 만든 적 없는 삶을 살아왔고, 애초에 과소비를 하지 않아서 수입보다 큰 지출을 해본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마지막 카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이너스 통장 개설은 예상보다 훨씬 쉽고 간편했다. 점심 먹으며 쉬는 시간에 앱에 접속했더니 몇 단계 확인 절차만 거친 뒤 바로 승인이 났다. 채 10분이 걸리지 않아서 이렇게 쉽게 마통의 길에 들어선다는 게 허탈하기까지 했다.


10분 만에 간단히 해결된 무이자할부의 덫.

6개월 뒤에는 깔끔히 해결될 수 있지만 그때까진 스스로 빚쟁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절약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을 이체한다.


'-2,000,000원.'


통장에 찍힌 숫자가 그녀의 눈 안에 각인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망 속의 한 줄기 빛이라 느꼈던 무이자할부는 J를 마통의 길로 인도했다. 마이너스통장은 현대인의 필수품이고 동반자 같은 존재라길래 일단 플러스 금액으로 통장을 유지해놓는 중이지만, 언제 또 이 달콤한 유혹에 넘어갈지 모를 일이다 싶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고 다짐해 본다.


와인냉장고는 일시불로 구매했다. 마통의 교훈이 아마 이게 아닌 것 같지만, 저렴한 걸로 샀으니 괜찮지 않을까.


*<조니워커의 우아하고 찌질한 혼삶>은 주 1~2회 연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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