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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북유럽에는 갈리아족에서 분파된 헬베티라는 부족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살던 지역을 헬베티아라고 불렀다. 이후 헬베티아는 스위스 지방의 라틴어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와 현재까지도 스위스의 정식 명칭으로도 쓰인다. 이런 역사적 요소들이 있는 상황에서 1950년대 스위스에서는 스위스 스타일을 갖춘 민족적 서체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19세기 유명 글꼴이었던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를 글꼴 디자이너 막스 미딩거와 에두아르트 호프만이 다듬어 새로운 서체를 만들었다. 이후 스위스적 서체를 표방하고 만든 서체인만큼 그를 표현할 수 있을 만한 명칭에 대해 여러 고민이 있었고, 헬베티아의 형용사격인 헬베티카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 형성을 일으켜 서체의 이름으로 결정되었다.
헬베티카라는 서체는 마치 흰색 페인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대답처럼 평가하기 힘든 존재이다. 어쩌면 머리로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큰 개념이다. 단지 뭘 먹을지 생각하는 대신 맥도날드로 가듯이, 산이 있기에 오르듯이, 그 곳에 있기에 쓰여지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사람들은 서체라고 하면 서체 그 자체로도 무언가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많은 서체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헬베티카는 ‘표현하지 않음’을 지향하는 서체이다. ‘Dog’라는 글자는 어떤 서체로도 쓸 수 있지만 그 글자 자체가 굳이 강아지 모양으로 보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헬베티카는 이런 '표현하지 않음'을 통해 어디에나 어울릴 수 있다. “I Love You.”라고 써도, “I Hate You”라고 써도, 헬베티카는 그 자체로 모던하고 명확하게 보이기 위해 필요한 모든 함축을 가지고 있다. 반면 헬베티카가 태어난 시기의 많은 여타 서체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각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서체가 아닌 텍스트 내용에 최대한 많은 의미를 표현하고 싶었던 디자이너들에게 ‘중립’이라는 의미만을 가진 헬베티카는 사랑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코카콜라 광고에는 문장마다 다른 수 많은 서체들과 난잡해 보이는 느낌표, 물음표들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가짜 웃음이 그려진 일러스트들로도 도배되어 있다. 하지만 헬베티카의 탄생 이후 광고 풍토는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으로 헬베티카를 사용한 코카콜라의 광고의 슬로건은 ‘It`s the Real Thing’이다. 마치 오늘날의 남성 잡지 시계 광고처럼 아름답고 큰 콜라 유리잔의 실사 이미지와 함께 헬베티카체로 된 ‘Coke’ 혹은 “코카콜라를 마시세요.” 라는 활자뿐이다. 군더더기가 없다. 의문도 없다. 그 자체만으로도 간결하게 소비자들의 마음에 훨씬 효과적으로 다가간다. 이 모래시계를 뒤집은 듯한 급격한 변화가 헬베티카라는 서체 하나 때문에 단 몇 년만에 이루어졌다. 헬베티카에게는 사람들의 무의식을 잠식하는 힘이 있었다. 마치 굳이 집집마다 방문판매원을 보내지 않아도 소비자들 스스로 줄을 서서 사게 만드는 브랜드처럼. 이런 의미에서 헬베티카는 하나의 단체였다. 현대 사회의 일원임을 표시하는 뱃지 같은 존재였다. 헬베티카로 표현된 모든 이미지들은 같은 이상을 공유하였다.
물론 헬베티카가 탄생 이후 지금까지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에 태동하여 1970년대에 활짝 피어난 포스트모더니즘과 히피즘의 화살들이 그것이었다. 시대는 어떠한 형태의 규제도 환영하지 않았다. '주류'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깨어져야 할 유리천장으로 취급되어졌다. 마침 발발한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국의 대기업들은 전쟁을 스폰하며 헬베티카체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반전 여론이 자리잡았던 시대 분위기로부터 더욱 외면받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시대성은 결국 디자이너들로 하여금 ABH, 즉 ‘Anything but Helvetica.’ 를 표방하게 만들었고, 각자의 고유한 서체를 쓰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인적이고 조악한 표현들이 고상함이라는 개념으로 포장되며 숭배되었고 간결함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헬베티카는 서체계의 파시즘으로 취급당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는 정도가 지나친 조악함들에 대한 반성의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단순하고 명료하고 지루한 것’과 ‘단순하고 명료하고 강력한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지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아가 그러한 시대적 문제점들에 대한 답은 다시 한 번 헬베티카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굳이 디자이너가 아닌 일반인이라도 전단지에 한 줄로 쓰인 Bold 헬베티카의 태생적 힘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헬베티카는 시대성을 초월하는 ‘Universe’로서 부활했고, 오늘날까지, 아니 어쩌면 저 먼 미래까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더 깊숙하게 자리잡아 더욱 굳건한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