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변한 게 없는데 몸은 벌써 중년이라며 온몸을 구석구석들쑤셔 놓는다. 그리고 이 정도 살았으면 이런저런 세상살이도 익숙해질 법한데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확증편향은 더욱 심해져 간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만큼 삶의 경험이 많이 쌓였다는 이야기이겠으나, 경험이 모든 걸 설명해주진 않을 테니 그러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건 애쓰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나이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꼰대가 되길 싫어하지만 결국은 꼰대가 되고 만다. 나도 그렇다.
세월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람 성격마저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정도로 긴 세월을 살아온 만큼 지나온 기억들 대부분은 어렴풋해졌다.
특히 호기심 많았고 온 세상이 즐거운 것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제 머릿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머리 한구석에 살짝 남아서 내 유년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밤하늘의 별을 보던 기억일 것이다.
창가에 턱을 괴고 하늘을 보면서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과 유성, 그리고 가끔 유난히 반짝이며 밤하늘을 가로지르던 인공위성의 여행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쫓아다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그 하늘에 떠 있던 그 많은 별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본 날은 언제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어릴 적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던 그 날이 바로 마지막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난 왜 그토록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밤하늘을 잊고 살게 된 것일까?
어쩌면 지나간 삶은 잊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시절에 가슴에 품었던 꿈들을 하나씩 잊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가슴에 품었던 꿈이라... 그런 게 있기는 했나 싶다. 하지만 내 나이 서른 즈음까지만 해도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이런 꿈을 꾸었었지. 조금만 지나면 그 꿈을 다시 그리는 그런 날이 오겠지. 분명히 기회가 있을 테지. 그리고 난 지금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그때도 그런 생각을 오래 할 순 없었다. 짧은 생각의 끝에는 곧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라던지, 뭘 마쳐야 하는지 같은 현실들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쁜 시간들을 하루하루 보내며, 나는 더 이상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또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세월은 그렇게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내 손가락 사이로 유유히 흘려 사라져 버리게 했다.
그리고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나는, 이제 와서 또다시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건 일에 여유가 생긴 탓도 있었지만, 대부분 어머니에 기인했다.
평소 건강하셨던 어머니는 건강검진을 받았고, 그 결과 암이 몸속에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가족이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검사 결과가 버젓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닐 거야"라는 말로 애써 사실을 부인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라는 막연한 응원을 했다. 그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 혼자 견디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인내의 시간은 부모님이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사실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게다가 이 사건은 또 다른 것을 깨닫게 했는데, 바로 내 삶도 영원치 않다는 것이었다.
삶의 언저리에 늘 존재하던 타인의죽음은 장례를 통해 항상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왔지만, 정작 내 가족, 그리고 내 죽음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 삶의 유한함을 망각한 채 살아왔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걸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두려웠다. 각성은 때론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삶의 일부이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칙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애써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또 사실이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단지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 유한한 삶의 깨닫고 나자, 이토록 소중한 삶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했던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나는 내 삶을 잘 살아왔을까? 나를 위해 살았던가?"
대학을 가려고 공부하던 시절도, 내가 회사를 다니고 엔지니어로서 삶을 시작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 때문에 괴로워하던 시절도, 그리고 이제는 제법 부러울 법한 수석 엔지니어의 자리에 앉아 있는 나의 삶도, 종국에는 내가 원하던 삶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난 내 삶을 온전히 내 것으로써 살아온 것인가? 아니면 파도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오가다 보니 이 자리까지 흘러오게 된 것일까?”
아마도 난 후자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그때그때 삶이 원하는 최선의 선택지로 발걸음을 옮기기에 바빴던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방향보다는 그저 바람이 등 떼미는 데로 흘러왔던 것만 같았다.
그럼 과연 내가 원하던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너무 긴 시간을 방황한 끝에 더는 그런 것이 머릿속을 차지할 공간조차 없는 사람이 돼버린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