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hnny Kim Mar 16. 2016

용눈이오름 이야기

늦가을 제주의 오름, 그리고 하늘.


가을이 끝나갈 무렵, 11월. 제주는 아직 가을이다. 여전히 가을이다. 따뜻한 남쪽 나라이기에, 제주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 가장 늦게까지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에 올랐던 세 오름들; 따라비, 새별, 그리고 용눈이는 가장 찾아가기 쉬운 곳이면서도 아름다운 오름들이었다. 억새와 푸른 하늘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한라산, 그리고 오름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제주의 풍경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늦가을 제주 오름 이야기. 그 첫 번째는 가장 최근에 다녀온 용눈이오름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11월 6일. 제주의 날씨는 흐림.



이전에 새별과 따라비에 오른 날은 맑은 날이었다. 새별오름에 올랐던 날은 특히나 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의 어느 부분을 골라 찍어도 예쁜 그런 날이었다. 짙고 깊은 푸른 제주의 하늘과 금빛으로 빛나는 억새는 제주의 가을 그 자체였다. 용눈이에 오른 11월 6일 금요일은, 그렇지 않았다. 밤새 거대한 구름들이 한반도 전체를 뒤덮었고, 아무리 제주도라고 해도 그 구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그 전 날 밤에 내일은 용눈이에 꼭 오르겠노라 다짐하고 잤는데. 구름이라도 멋지게 덩어리 지길 바라며 길을 나섰다.


용눈이에 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다만, 버스를 타고 가려한다면, 용눈이 근처를 지나는 버스가 하루에 열 편밖에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무식해서 용감한 나머지, 필자는 성산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네이버 지도상에는 "차남동산"에서 내리라고 안내되는데, "다랑쉬오름 입구"에서 내리는 게 더 가깝다. 버스 기사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다. 차남동산에 간다고 하니, 용눈이에 오를 거냐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하니 한 정거장 더 가서 다랑쉬 입구에서 내리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내려서는 입구까지 2킬로미터정도 걸어 들어가야 한다. 남자 걸음으로 15-20분 정도 걸린다. 


용눈이 가는 길. 광치기해변에 잠시 들렀다.



필자가 지내는 곳은 남원읍 신례리. "공천포"라고 불리는 바닷가 마을이다. 용눈이 앞을 지나는 버스는 제주시-성산을 잇는 노선인데, 여기서 그걸 타려면 일단 성산까지 들어가야 한다. 용눈이에 4시쯤 도착하리란 계산으로 오후 2시쯤 출발했다. 환승 경유지인 광치기 해변에서 성산일출봉 사진을 몇 장 건지고 가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웠다. 일정이 틀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생의 90퍼센트를 서울에서 살아온 도시 촌놈은 호기롭게 제주에도 버스가 자주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필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고성리에서 보기 좋게 버스를 놓쳐 버렸고, 그대로 한 시간을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버스 정류장에 깔려 있어야만 했다.


버스를 탄 건 오후 4시 50분. 이미 용눈이 정상에 올라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어야 했을 시간에 성산에서 출발했고, 5시 반이 돼서야 입구에 도착했다. 제주의 일몰은 6시 30분경. 게다가 흐린 날이라, 해는 더욱 짧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이미 어둑어둑해진, 가로등도 없는 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글루미 앤 다크. 하지만 예쁘다, 제주.



정상에 오르니 이미 해는 저 너머에 있었다. 사실 흐린 날이라 해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지만. 도시 촌놈 사진작가는 반경 10킬로미터 내에 가로등 하나 없는 산골 구석 동네에 박혀있는 오름의 정상에서, 흐리고 비 쏟아지는 가을 저녁에,  하나둘씩 하산하는 시점에, 그 정상에 홀로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촬영은 성공.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와 저 멀리 다랑쉬 오름의 봉우리도, 걱정했던 것보다 잘 나왔다.

먹구름이 살렸다. 최악의 날씨에서, 나를.



사실 필자는 어둡고 우울한 느낌의 사진은 촬영하지도, 그렇게 작업하지도 않는 편이다. "예쁘고 밝고 화사하고 편안한 장면도 얼마든지 널렸는데 굳이 왜.."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촬영은 필자의 Comfort Zone에서 벗어나, 그 경계를 대담하게 건너버린 촬영이었다. 사실 제주의 차분한 풍경이 많이 도와줬다. 어둑어둑하지만 어둡지 않게, 우울해 보일 수 있지만 차분하게. 제주에서 만난 최악의 날씨지만, 제주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딱 알맞은 만큼의 절제된 어두움을 표현해 줬다.


어둡지만, 무섭지 않았다.


어둡지만 무섭지 않았다. 차분했다. 오히려 절제된 어두움에서 나오는 그 몽환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한 채로 셔터를 눌렀다. 그 와중에 온 세상이 손전등 없이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해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떼며 내려가는 길에, 설상가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대만과 홍콩에서 대책 없이 쏟아붓는 비에 젖어본 경험이 꽤나 많아서, 요매애애앤큼도 놀라지는 않았지만. 사실 짜증은 좀 났다. 가는 길에 비에 젖은 냄새를 풍길 걱정과, 빨랫감이 늘었다는 생각에.


버스 시간 덕분에 한 시간이나 고생을 했기에, 돌아가는 버스 시간은 이미 꿰고 있었다. 저녁 여섯 시 오십 분. 여섯 시쯤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했다. 정류장 가는 길은 정말 가로등도 하나 없는, 그런 도로였다. 지나가는 차는커녕 반경 10킬로미터 내에 사람 사는 집도 없는 그런 동네. 비는 쏟아지지, 장비는 무겁지, 길은 어둡지. 정류장까지 걸어갈 길은 정상에서부터 따져도 고작 3~4킬로미터.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한 걸음 한 걸음이 꽤나 묵직하고 힘들게 다가왔다.


고생은 했지만, 소득은 있었다. 사진 그 자체보다도, 내 사진 세계의 Comfort Zone에서 벗어나 봤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이 108일간의 해외 무전 배낭여행을 통해 이전보다 조금 일지는 몰라도 분명히 자랐고, 강해졌단 걸 확인했다는 것. 계획이 꺾여도, 어두워도, 우산 없이 비를 맞아도 담담하게. 그리고 4킬로미터 정도면 가볍게 걸을 만한,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하는 것까지. 이전과 많이 변했다. 그걸 느꼈다.



쉼 없는 낭떠러지를 버텨내는 여행을 하고 돌아와,

이전보다 조금은 여유로운 계획으로 다시 떠났다.



하루하루 사진을 찍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알아가고 있다. 조금씩.


비가 와도 흐려도 여전히.


  


스무 살 꼬맹이의 45개국 엽서여행

2차 투어, 33일 차. 서귀포에서,


재일 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