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ycekim May 10. 2020

고래 숨

브런치 작가가 되기까지

고래에게는 아가미가 없다. 그래서 바닷속에 살면서도 수면에 올라와 숨을 쉬고 다시 깊은 바다로 돌아간다고 한다. 숨을 쉬겠다고 생각한 시점의 나는, 애매한 나이와 경력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백수가 되었다. 나와 같이 간호학 석사까지 한 친구들은 관련된 일을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점점 전문가가 되어가는 친구들에 비해 스스로가 더욱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점점 더 깊은 바다가 무서웠다. 주변에 보이는 멋진 물고기들은 이렇게 깊이 들어온 것이 아깝지 않냐고 했지만, 내게는 아가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도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취미에 진심인 편이었고, 특히 대학로에서 살며 ‘연뮤덕(연극·뮤지컬 덕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 희곡을 써 보는 게 어떨까?' 그 생각을 하며 나는 하루만에 2막짜리 희곡을 기획했다. 이러다 곧 포스터에 이름을 올리는 극작가가 되고 말겠다는 김칫국을 마시며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예상과 달리 내 머릿속 이야기를 희곡으로 풀어내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희곡 쓰기에 도움을 받으려고 산 책들은 초보인 나를 혼내는 것처럼 느껴졌고, 내 희곡은 멈춰 서고 말았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글을 쓰는 대신 많이 읽게 되었고 상상의 세계에서 오래 시간을 보냈다.

 

우왕좌왕하던 나는 빛이 보이는 높이까지 올라와 보기로 했다. 일단 수면 가까이 와봤는데, 이렇게 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물고기들이 나를 지나쳐 깊은 수면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나는 왠지 부끄러워서 다시 깊은 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겨울날, 나는 속초의 북 스테이에 가보기로 했다. 세상의 모든 것에 지쳐버린 나에게 그 여행은 필연적이었다. 나무 냄새, 보이는 책들, 방에서 천창을 열고 듣는 새소리에 나는 생각을 멈췄다. 그 조용하고 짧은 여행에서 나는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만났다. 그 책에 끌린 이유는 저자인 줄리아 카메론이 극작가이면서 연출까지 하는 사람이었는데, 따라 하면 나도 저런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허영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나는 그녀를 따라 모닝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다. 그 책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무엇을 좋아해야 할지 세상이 가르쳐주는 대로 경솔하게 따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영혼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 로버스 루이스 스티븐슨

그래서 나는 매일 영혼을 깨우기 위한 모닝 페이퍼를 거르지 않고 쓰기 시작했다.

속초 '숲 휴게소'의 공용공간

다시 깊은 물속으로 돌아가려니 어쩐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돌아가기 전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수면 위로 올라가는 연습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모닝 페이퍼를 쓴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시점에, 나는 처음으로 소설을 완성했다. 매일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쓰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두고 온 가방’이라는 짧은 소설이 완성되었다. 소설을 쓰고 나니 내 머릿속에 함께 떠오른 장면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 날로 소설의 삽화까지 그렸다. 그렇게 완성된 글과 그림을 보는데, 그제야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수면 위로 떠올라 숨을 쉬는 것을 연습하다가, 어쩐지 폐에 시원한 공기가 들어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아래에서 답답하게 눌렸던 가슴이 펴지는 경험은 오래전 얕은 물에 살 때의 행복한 기억을 불러왔다.


글을 쓸수록 진짜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커져서 독립출판을 검색해 보다가 나는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브런치작가들의 다양한 활동을 보고, 나는 일단 써둔 소설이었던 ‘두고 온 가방’으로 브런치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써서 모은 소설들이 지금은 ‘오후엔 소설 한 조각’이라는 브런치 북으로 발행되었다. 아직 시작 단계지만, 혼자 쓰던 글과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계속 숨쉬기 연습을 하던 나는, 누군가 나를 보고 ‘너도 고래구나라는 말을 하고 지나가는 것을 들었다.  커서 숨을 쉬는 방법을 연습하는  누가 보면 부끄러울  알았는데,  말이 자꾸 생각나고 기분이 좋아 미소가 지어졌다.


데이먼 나이트는 글을 쓰는 재능이 생각보다 흔한 것이며, 심지어 작가가 되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매일 쓰고 그리다 보면 10년 안에는 작가로서의 내 이름이 익숙한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또, 브런치 작가가 되면서 나는 모든 일에 열린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글의 영감을 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숨 막히던 직장에 대해 회상하는 것도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제는 글을 쓰는 일이나 그림 그리는 일을 계속할 것임을 알기에 심지어 다시 취직을 하는 일도 고려할 만하다는 태도가 생겨날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나도 작가가 맞다고 생각한다.

숨을 쉴 줄 아는 고래가 되는 것은 내게 자유를 의미했다. 숨을 쉬러 수면까지 올라오는 것도, 다시 깊은 바다로 돌아가는 것도 두렵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자유로운 고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