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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파 마르죠 Oct 31. 2020

똥차의 추억 10

비싼 인생수업

막내는  학교생활은 잘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은 잘했나 보다.

보호관찰 들어간 지 열흘 정도 지나자 딸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냐고 연락두절이라고 사고 난 건 아니냐고. 온갖 억측과 걱정이 난무했다.

그냥 집에 있다고 좀 아프다고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 같이 있었던 아이한테는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난 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안 좋은 사건일수록 하나씩 더 보태어져 눈덩이처럼 이야기가 부풀려지고 왜곡된다는 사실을 안다. 나한테는 쉬쉬하지만 벌써 알만한 친구는 다 알 것이다.




학교 측에서도 장기결석에 따른 이유는 직접 내방해서 서류 작성하라고 했다. 생활지도 선생님을 만나 자초지종 설명했다. 근데 이분이 참 특이하시다.

"어머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따님을 잘 아는데요. 인사성도 바르고 똘똘한 친구예요. 누굴 때린 것도 아니고 몹쓸 짓 한 것도 아닌데요 뭘."


중학교 때도 대분분의 선생님들은 딸의 행동과 언행을 깎아내리고 벌칙이 어쩌고 졸업을 못 시킨다는 등 부정적인 말로 일관했다. 근데 인성이 좋고 똘똘하단다.

담임선생님도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어머님 상심이 크시죠? 에고 잘 해결되어서 얼른 학교로 돌아와야 할 텐데요."


특성화고 선생님들은 사고 치는 애들, 특히 남자애들의 폭력성과 폭력학생 부모님들의 방조와 무식한 언행에 질려 있던 터였다. 딸은 학교 나가기 싫어하고 공부 안 하고 음주하는 정도의 준수한 레벨에 속하며 엄마인 나는 딸의 편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 선생님들도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던 것이다.


막내딸은 한 달 동안 얌전히 보호와 관찰을 받았다. 가을이 깊어가고 나뭇잎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어느 날 보호관찰 팀으로부터 나가도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


나의 애마 똥차를 몰고 사랑하는 내 보물 딸을 데리러 갔다.

"고생했어 딸"

"엄마도 힘들었지? 고마워."

 우리는 그렇게 서로 위로하고 고마워하며 그 지겨운 한 달여간의 보호시설에서 나왔다.


"이렇게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게 좋다"

자유 냄새가 좋다는 말이지? 그래 맘껏 마셔.

자유로운 왜가리


집 가는 길에 몇 달간의 가정보호관찰 실시를 위해 서울 거여 쪽에 있는 기관을 방문했다.

간단한 심사를 마치고 매일 밤 열 시에 집에 전화로 본인이 가정에 있는지 확인 전화를 한다고 한다. 집 전화기를 사야겠네?

한전에 연락해서 집 전화 통신망도 개설했다.


한 달에 한 번 보호 관찰사 방문도 한다. 중간에 시청에 있는 청소년 상담센터에 가서. 아이엄마 둘 다 상담도 받는다. 관찰소에서 나왔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한 달 만에 집에 왔다. 샤워도 했다. 밥도 먹었다. 강아지를 안으며 보고 싶었다고 말도 했다. 그렇게 자유로운 하루가 갔다.


학교도 나갔다. 며칠이 지나 밤 10시에 관찰사로부터 확인 전화가 왔다. 그것도 매일~


딸은 처음 일주일간은 집에 잘 붙어 있었다. 왠 걸 그 이후엔? 또 나다니기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이 한 술 하는 치구들인데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또 나와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밤 10시 확인 전화 안 받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면 여지없이 경고 문자가 왔고 딸은 만회하기 위해 보호소 사무실 가서 훈계를 듣고 와야 했다.


겨울방학이 되어 제빵 자격증을 따기 위해 제빵 학원에 등록했다. 첨엔 이론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해서 문제집을 샀다.


이 놈의 딸내미가 한 두줄 읽더니 눈에 안 들어온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학원도 빠졌다. 할 생각 없으면 하지 말라고 했다.

남은 기간 환불을 받았다.


보호관찰 담당자가 연락이 왔다. 요리사 과정 은 잘 배우고 있냐고. 잘 배우고 있다고 했다.

딸은  이번엔 한식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서울 강남 ~학원에서 자격증 세 개 정도 따기로 하고 1년 과정을 등록했다. 제빵 과정, 한식, 일식 요렇게 세 개 정도는 딸 수 있다고 한다. 이 학원에선 필기시험은 나중에 치르고 요리실습 과정이 먼저였다. 첨엔 잘 나갔다. 요리한 음식을 싸와서 먹어보라고 대접도 했다. 마들렌 빵, 식빵, 등등  고난도 빵도 제법 잘 만드는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나니 버스 타고 한 시간 반 걸려서 다니는 게 힘들다고 띄엄띄엄 결석을 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아예 나가지도 않았다.

잔소리가 먹히지도 않았고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가정보호관찰 기간도 끝나서 이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그 후로도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졸업이나 대로 할까? 못 하면 검정고시라도 봐야지 하면서 걱정은 되었지만 무사히 졸업하기만을 바랬다.


졸업시켜 준단다

 울 막내 꼴통이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 죽을 만큼 힘들고 외로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제 너의 길을 가라. 사회생활을 먼저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생각보다 강단 있고 생각보다 의리 있고 생각보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 생각보다 사회생활도 잘한다

  

엄마 생각해서 삼계탕도 끓여주는 딸이다.


어렸을 때?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 거다. 학원 끝나고 밤 10시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딸이 "엄마, 내가 국수 삶았어. 얼른 먹어"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국수를 삶고 체에 거르고, 육수도 따로 끓여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서비스를 해 준 것이다.


 이런 아이를 어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한다. 내 딸.


10부 끝

그동안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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