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벌써 결혼 30주년이다. 연애기간까지 합치면 남편과 함께한 시간이 벌써 34년이나 흘렀다. 낳아주신 부모님과 산세월보다도 둘이 보낸 세월이 더 많다.
1991년 가을에 우리는 21살 서울여자와 27살 경상도 남자로 처음 만났다. 나는 학생이었고 남편은 대학을 갓 졸업한 직장인이었다.
그즈음엔 가끔 시간이 나면 작은 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일을 도와주곤 했다.
그날도 언니에게 일이 생겨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오후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주문을 했다.
음식이 다 나가고 난 뒤 그중 한 명이 잡채를 서비스로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내가 당황하며 안된다고 했지만 계속해서 웃으며 능글맞게 딴지를 걸었다.
어쩔 수 없이 잡채를 서비스로 주었고 그 사람은 나에겐 진상손님으로 기억이 되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남편의 첫인상이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언니가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바로 내가 기억하는 진상 손님이었다. 일을 도와주는 나를 보고 마음에 들어 그 이후로 매일 식당에 와 단골이 되었고 언니에게 동생을 소개해 달라며 작업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처음 만난 날 남편은 전부터 나를 눈여겨봐 왔다며 잡채 사건은 그냥 나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 장난을 쳤다고 했다. 당황하는 내 모습이 이쁘고 귀여웠다고 하면서 말이다. 말하자면 남편은 그런 식으로 관심의 표현을 한 것이었다. 이 남자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진정한 연애 바보 아닐까, 아마도 연애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표현에 솔직한 서울여자와 표현에 서툰 경상도 남자가 만나서 연애기간 동안 많이도 싸웠다. 싸웠다기보다 일방적으로 내가 삐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 번은 대화 중에 "문둥기 가시나"라고 해서 싸운 적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욕이라고 생각했고 남편은 경상도에서는 욕이 아닌 가깝고 아끼는 여자 친구에게 쓰는 애정 어린 호칭이라고 했다. 결국 남편의 고향 선배의 설명으로 오해를 풀었지만 가끔씩 소통이 안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려서 무시한다는 생각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가끔 남편은 "내가 어린 당신을 키워서 데리고 왔어"라고 말하며 웃기도 한다.
연애하는 4년 동안 싸우면서 철도 함께 들어갔던 것 같다.
내가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아빠의 장례식 때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9월 중순인데도 더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빠의 장례식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3일장으로 치러졌다. 단지 안에 천막을 치고 돗자리들을 깔아 그 위에 상들을 펴놓고 조문객들 받았다.
연락을 받고 급하게 온 남편은 여름용 검정 양복이 없었는지 두꺼운 겨울 양복을 입고 3일 내내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궂은일을 도맡아가며 움직였다.
조문객들에게 음식도 나르고,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도 치우고, 집안 어른들께 인사도 하며 그 자리를 지켜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신 고모 삼촌들은 막내 사윗감이 제일 잘한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렇게 남편은 어른들께도 높은 점수로 눈도장을 자연스럽게 찍었다. 예의 바르고 싹싹하게 잘하면서 힘든 내색 없이 최선을 다해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내가 평생 의지하고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하는 동안 나는 성향이 다른 이 사람과 결혼해 잘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는 3일 동안 지켜본 남편의 모습은 내게 믿음과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35년 가까이 함께한 우리는 앞으로도 큰 이변이 없다면 그만큼의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한다. 지난가을공원에서 노부부가 서로 손을 잡고 서로를 의지 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멀지 않은 우리의 미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저분들처럼 건강하게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힘들 때나 즐거울 때 항상 곁에 있어주고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는 인생의 동반자, 남편은 나에게 선물 같은 고마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