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으로 담아낸 기억

by 조작가

여행의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인지 오늘은 유난히 피곤했다. 따듯한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었지만 유혹을 떨쳐 내고 수업을 들으러 집을 나섰다. 수업 내내 머리가 멍하고 뒷목도 뻐근한 데다 속도 더부룩한 것이 영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여행으로 집을 며칠 비웠기 때문에 장을 봐야 하지만 그럴 힘도 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주차장 차 안에서 마트로 갈지 집으로 갈지를 한참을 고민하다가 핸들을 그냥 집으로 돌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여보 " 하고 불러보니 "응?"하고 나올법한 남편이 없었다. 조용했다."아참, 저녁 약속이 있어서 외출한다고 했었지, 그럼 혼자서만 저녁을 먹으면 되겠네" 하면서 순간 저녁을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과 마트로 가지 않고 핸들을 집으로 돌린 선택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면서 혼자 무엇을 먹어야 하나 고민을 하는 중에 식탁 위에 있는 단호박이 눈에 띄었다. 나는 컨디션이 나쁠 때면 항상 호박죽이 먹고 싶어진다. "그래, 오늘은 호박죽이다."


나는 호박죽에 팥을 넣어 끓여 먹는다. 단, 짠, 신, 쓴맛 중에 특히 단맛과 고소한 맛을 좋아하는데 달콤한 호박과 푹 삶은 고소한 팥이 만나면 그 맛이 일품이다.


제일 먼저 팥을 씻어 불린 후 삶는다. 첫물은 버려야 팥의 쓴맛이 없어져 뒷맛이 깔끔하다. 그다음 물을 넉넉히 붓고 소금을 살짝 넣어 푹 삶는다. 팥을 삶는 동안 단호박을 반으로 잘라 손질한다. 속을 다 파내고 또 반으로 잘라 감자 칼로 껍질을 깎아 낸다.

그리고 냄비에 손질한 호박과 약간의 찹쌀을 넣고 재료들이 잠길만큼만 물을 붓고 끓인다. 호박과 찹쌀이 다 익었으면 도깨비방망이로 살짝만 갈아준다. 파 실한 호박이 입안에서 조금씩 씹히면 그 또한 즐겁다. 호박이 준비가 다되었으면 삶은 팥과 함께 섞어 약간의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찹쌀가루를 섞은 뒤 약한불에 살짝 끓여서 뜸을 들인다.


완성된 호박죽과 아침에 해놓은 두부조림, 시원한 동치미를 이쁜 그릇에 담아 나만의 저녁상을 차려 식탁에 앉았다. 달콤하고 고소한 호박죽을 한입 넣으니 여독이 풀리는 듯하면서 지쳐있던 기분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문득 호박죽을 좋아하시던 엄마와 어머님이 생각이 났다. 한 번도 못 해 드린 엄마에게는 미안해졌고 내 호박죽을 좋아하시던 어머님과는

추억이 생각났다.


어머님이 요양병원에 계실 때 형제들이 매주 번갈아가며 면회를 갔었다. 나는 갈 때마다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팥죽과 호박죽을 번갈아가며 준비해 갔다. 입맛이 없다고 식사를 안 하시다가도 내가 만들어간 죽은 잘 드셨다. 한 번은 같은 병실에 계시는 다른 어머님들께도 대접하기 위해 많이 준비해 간 적이 있었다. 그릇에 담아 나누어 드릴려고 하니 어머님이 조용히 한 분을 가리키시며 "저이는 주지 마"하셨다. 아마도 그분과 말다툼이라도 하신 듯했고 그러시는 어머님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매일 비슷한 병원밥만 드시다가 오랜만에 호박죽을 먹으니 너무 맛있다고 하시며 잘 드시는 어머님들을 보며 마음이 뿌듯했다. 가끔 내가 어머니 손톱이라도 깎아드릴 때면 한참을 쳐다보다 슬그머니 본인 손톱을 쳐다보시는 분도 있었다. 그러면 그날은 병실에 계신 어머님들의 손톱을 모두 깎아드려야 했다. 그러고 나면 어머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면서 병실에서 대장이 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남편은 팥죽과 호박죽을 먹을 때마다 어머니생각이 난다며 눈물을 흘린다. 나도 부모님들과 추억이 있는 음식들을 만들어 먹을 때면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음식은 기쁨도 주지만 때론 슬픔도 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 때면 맛있게 먹을 그들을 생각하면서 행복하고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리워져 슬퍼진다. 음식은 단순히 맛있게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우리들의 희로애락이 함께 담겨있기 때문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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