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카톡 연이어 가족방이 시끄럽게 울렸다. 설거지를 하다 멈추고 잽세게 뛰어가서 확인을 해보니 2주 내내 야근했는데 오늘 또 야근을 해야 한다며 힘들 때 쓰는 이모티콘을 마구마구 쏘아 올리고 있는 딸이었다.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요즘 취업들이 안 돼서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다행히도 졸업하자마자 취업이 잘 되어서 걱정을 덜어준 고마운 딸이다. 그런데 회사가 너무 멀어 다니기 힘들다며 독립을 위한 투쟁을 조용하고 강렬하게 시작했다. 대학교때까지도 통금시간이 있을 정도로 딸아이에게 애정이 남달랐던 남편을 설득하기까지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딸은 끝내 소망을 이루었다.
독립하기로 결정을 한 후 지하철역에서 가깝고 깨끗한 지역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후보지중 고민 끝에 마곡 쪽에서 다행히도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고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하게 되었다. 큰 숙제라도 끝낸 듯 홀가분한 기분으로 차를 타고 집으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에 익은 초등학교가 보였다. 내가 2학년때까지 다니던 양천 초등학교였다. 딸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둥지를 튼 곳이 바로 내 고향 옆 동네였다.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졌다. 그때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남편이 학교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학교 옆 공터에 주차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옛날 어릴 적 등굣길에 준비물을 사고 남은 돈으로 알사탕을 사 먹던 기억 속의 문방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반가웠다. 그곳은 어린 내게는 신세계 같은 곳이었다. 간판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방구를 뒤로하고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가 보았다. 작은 꼬맹이가 타고 놀던 그네 시소 미끄럼틀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시절 크게 느껴졌던 운동장이 이젠 너무 작고 아담해 보였다.
"그만큼 내가 커졌기 때문 일거야'
학교를 둘러보고 교문을 나와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동네 입구 쪽에 제일제당 공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었다. 동네도 많이 개발되어서 옛날의 모습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옛 우리 집을 찾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있을 때 눈에 익은 슈퍼하나가 보였다.
'골목입구에 슈퍼가 있었는데.... 찾았다. 슈퍼를 끼고 골목으로 쭉 가다 보면 이쯤에서 우리 집이 있었는데.... 어.... 없네.... 이상하다'
한참을 찾던 중 세월을 말하는 듯한 큰 감나무 두 그루가 보였다.
'혹시 여긴가'
그곳에는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집이 없어지고 낯선 빌라 두동이 들어서 있었다. 순간 섭섭하고 허전해졌다. 내 추억이 모두 도둑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감나무는 이 집에 이사 오면서 아빠와 우리가 리어카에 실어와 함께 심은 추억이 있는 나무였다. 그때는 조그만 아기나무였는데 세월이 흘러 이렇게 많이 커줬다.
"그래도 너희들이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잘 자라줘서 고맙다."
아쉬운 마음에 잠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여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내 머릿속의 타임머신이 50년 전 추억의 집으로 가있었다.
디귿자형 한옥집에 아담한 마당과 우물이 있고 대문 쪽에는 얼마 전 뒷집에서 분양받아온 아기백구 해피가 있다. 큰언니는 마루에서 만화책을 보고, 작은언니는 백구에게 밥을 주고 , 오빠는 뒤뜰에서 개구리를 잡아 언니들에게 장난을 쳤다. 그렇게 아옹다옹하고 있으면 엄마는 우물에서 빨래를 하시다가 항아리에서 숙성이 잘된 홍시를 쟁반에 내어 주셨고 우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옹기종기 모여 맛있게 먹었다. 그 맛은 그 시절의 행복만큼 꿀맛이다.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계시는 엄마는 뽀글이 짧은 파마머리 할머니가 아닌 긴 머리를 예쁜 핀으로 곱게 올려 꽂은 젊은 엄마다.
상념에 빠져있다 보니 순간 바람이 불면서 어디선가 엄마의 냄새가 나는 듯했고 먼저 떠난 아빠 엄마 오빠가 그리워졌다. 이젠 모든 게 내 머릿속 타임머신 공간에만 있는 기억들이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공원 산책을 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과일가게에 있는 잘 익은 홍시를 한 바구니 사 왔다. 반을 잘라 한입 먹어보니 다시금 그 감나무가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니 그 집에서 좋은 기억도 있었고 나쁜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밑거름들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