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같아도 결국 살아내는 엄마
하루 12시간 근무자.
총 쉬는 시간 90분.
사실 따지면 80분.
내가 일하는 곳은, 운영시간에
브레이크 타임이 따로 없기 때문에 돌아가며 당번을 선다.
그리고 당번들을 배려해
쉬는 시간 10분 정도는 미리 나가줘야 한다.
그래서 공식적으론 90분이지만,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건 80분 남짓이다.
그런데 오늘,
나의 그 소중한 80분은 고스란히 병원 방문에 쓰여야 했다.
아이의 감정 기복이 최근 심해져
약을 바꿔볼까 고민하던 차였다.
평소 같았으면 이 아까운 쉬는 시간에
옷을 갈아입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한다.
유니폼을 입은 채, 앞치마도 제대로 못 벗고
그냥 후다닥 볼 일을 보고 오는 게 내 루틴이었다.
그런데 아이 병원에 갈 때만큼은 달랐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그때만큼은 꼭 옷을 갈아입었다.
엄마로서의 마지막 체면 같은 거였다.
(누가 모르더라도, 나만큼은 알고 있으니까.)
그날도 쉬는 시간에 맞춰
헐레벌떡 나갈 준비를 하는데
어김없이 나의 ‘병원 루틴’이 시작됐다.
옷 냄새 킁킁,
머리카락 킁킁,
팔 냄새 킁킁,
가방 끈까지 킁킁.
고기 냄새라는 건 어디에 배면 끝이다.
특히 병원 같은 공간에서는 더 신경이 쓰였다.
그곳에서만큼은 나의 직업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냄새가 조금이라도 의심된다 싶으면
섬유탈취제를 옷에 뿌린 건지
공중에 뿌린 건지 모를 정도로 왕창 뿌렸다.
그러다 숨이 막혀 헛기침도 했다.
지하철로 왕복 40분이 걸리니까
실제로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그 순간, 나는 존재감 없는 육상선수가 됐다.
가게 문을 박차고 나오며 외쳤다.
“나 병원 좀! 금방 올게요! 아니, 어떻게든 올게요!”
직원분이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이미 절반쯤 뛰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진료시간엔 늦지 않았다.
하지만 앞사람 진료가 길어져 생각보다 시간이 훅 밀렸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대기실 의자에서
아이의 상태를 조목조목 읊조리고 있었다.
해야 할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빙빙 돌았다.
“장○○ 어머님, 들어가실게요.”
드디어.
지금 이 시간에 진료가 끝나면
다행히 매장에도 시간 맞춰 복귀할 수 있다.
잠시 한시름 놓았다.
의사 선생님은 요즘 아이의 상태를 묻고 내 설명을 주의 깊게 들으셨다.
나는 준비해 온 메모처럼 그간의 변화들을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기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음, 어머님. 상황이 좀 심각하네요.”
의사는 잠시 모니터를 보다가
내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어머님, 여건이 괜찮으시다면
잠시 일을 쉬시면서 아이만 케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바로 대답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럼 월급은...'
순간 머릿속에서 카드값, 학원비, 고정지출비, 그리고
통장 잔고가 폭주기관차처럼 돌진해 왔다.
“어머님, 아이가 지금처럼 불안정할 때는
엄마의 밀착 케어가 필요해요.
가능하신가요?”
'가능하냐고요?
선생님, 가능하면 제가 지금 이렇게 뛰어왔겠습니까...'
나는 속으로 외쳤지만 현실에서는 아주 여건이 된다는 냥,
“…네. 그래야죠. 아이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이토록 모범적인 답변이라니 싶지만,
나를 고뇌에 차게 한 비현실적인 문장.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입꼬리는 어색하게 올라가 있었고
어깨는 한 번 들썩였다가 금세 힘없이 축 처졌다.
상태의 심각성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
자책감인지,
뭐가 원인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난, 또다시 쭈글스러운 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매장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화장을 잔뜩 한,
아줌마인지 할머니인지 영 분간이 안 되는 어떤 여자를
노려보는 듯, 아닌 듯한 애매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 상황에 저 여자가 거슬리는 나 자신이 웃기기도 했다.
헤매는 생각을 잡아다 얌전히 앉혔다.
다시 머릿속이 시끌버끌하다.
'하, 일을 쉬라니...
일을 쉬면...
돈은 누가 벌고...
카드값은...
대출이자는...
지금 매장에 일손도 부족한데 쉬겠다면 허락해 줄까...
내가 쉬는 동안 불판은 누가 뒤집나...
내 통장은 누가 구워주나...'
점점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불판도 야무지게 뒤집는데
내 인생은 그대로 뒤집히지 않는 것 같아서 괜히 서러워졌다.
잠시 후 나는 도대체 왜 저 여자를 빤히 보고 있었나 싶어
슬그머니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병원에서보다 더 쭈글쭈글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와.. 오늘도 멋지게 망가지고 있네.
이 정도면,
나락인 걸까...’
웃기지도 않은데 웃음이 나왔다.
웃음인지 체념인지 구분이 안 갔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속으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이거... 버티기 챌린지,인 건가...."
그 말을 속삭이자마자
내 마음 한편에서 또 다른 내가
양손을 허리에 얹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챌린지면 어때.
난 약해 보이지만 은근 강해, 이런 거 잘해.'
생각해 보면 육아도, 일도, 살아가는 것도
매일매일이 챌린지였다.
'이제 와서 하나 더 늘어났다고 대수일까.
그래. 버티기 챌린지면 버틴다.
어차피 내 인생은 지금까지도 미션 연속이었으니까.'
몸은 조금 지쳤지만, 그 속엔 버텨내겠다는 짤막한 기세가 올라왔다.
티는 안 나지만 잔잔한 억척스러움, 그게 나였다.
그리고 나는 작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버티기 챌린지든 뭐든,
오늘도 다시 살아낸다.
그리고 내일도,
또 그렇게 살아 낼 것이다.
이런 하루라면...
다시 일으켜 세울 힘쯤은,
나한테 아직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