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어떻게 나를 다시 살아 있게 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
결혼한 사이도, 아무리 사랑해도
둘 중 하나는, 먼저 떠나리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투병 중인 사람은 죽음을 대비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긴 생을 다하고,
천천히 마지막을 맞을 거라 믿는다.
죽음을 멀리서 서서히 다가오는 기척쯤으로 여긴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준비되어 있을 수 없다.
그 소식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예고도 없이 무작정 삶 한가운데를 파먹는다.
죽음 그 자체보다 더 가혹한 것은
마음의 대비를 단 한순간도 허락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허망하게 잃은 사람은
살갗을 비집고 들어오는 고통을 겪는다.
가슴이 뻥 뚫린 채 남은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알게 된다.
죽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없다는 사실이 끝없이 존재하며
삶을 함께 한다는 걸.
그의 부재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함을 드러낸다.
이제는 혼자 마시는 모닝커피에도,
강아지 산책을 갈 때에도,
음악을 들을 때도,
잠들기 전에도
그는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죽었다는 사실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지금의 상황이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차츰 내적 수락을 한다.
타협점을 찾아 익숙해지기까지,
어떤 훈련을 거치는 셈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닌,
결여에 담담해지는 법을
조금씩 익혀가는 것이다.
빈자리에 순응하는 건,
나의 의지가 아니다.
세상에 대꾸할 의사도 없이
받아들여야 함이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닌,
어떤 새로운 적응기쯤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천천히 회복해 가는 것이라고.
홀로여도 충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로 했다.
충만하기로 해서
삶이 단숨에 희망으로 밝아지지는 않는다.
슬픔은 여전히 불시에 밀려오고,
평온한 줄 알았던 마음도
어느 순간 툭 하고 내려앉는다.
쓰러졌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렇게 흘러온 자리에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이 감정들이 아무리 거세게 요동쳐도
마침내 숨을 돌릴 지점이 찾아온다는 사실.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결국은 물러난다.
숨이 가빠도
어느 순간엔 다시 고르게 돌아온다.
이제는, 내 삶이 언제까지 어둠에 잠겨 있을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는다.
빛이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빛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안에서 비롯된다.
누가 대신 말해주지 않아도
'내 안의 나'를 먼저 불러 냈다.
"고단하구나."
"참 막막했지."
"그렇지. 허무했을 거야."
"두려웠겠다."
"외로웠겠네."
"불안했지."
예전에는 외면하던 감정들이
지금은 나를 향해 손을 내미는 듯 보였다.
살며시 안아달라는 아이 같은 내 마음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나는 나타나는 감정들을 억누르지 않기로 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자하게 대하기로.
감정이라는 건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다.
삶은 매끄러운 직선이 아니다.
능선을 타고 흐른다.
가파르고, 꺾이고,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선다.
나는 그 흐름에 저항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대로, 기우는 대로 두었다.
그 안에서
내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살아보니
비로소 보였다.
마음이 제 자리를 찾으려면,
몸도 붙들릴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자리를 비워 두고 있다.
아이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던 시기,
나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일을 내려놓았다.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지만,
그날의 선택이 내 삶에서 무엇을 흔들어놓을지
당시는 알지 못했다.
일을 멈추자
일상의 리듬도 함께 멈췄다.
움직임이 줄어들자
생각이 쓸데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불안함이 나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침내 알게 되었다.
나는 ‘일하는 사람’ 일 때 가장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은 버거운 생계의 반복이 아니라,
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불 앞에서 흘리던 땀,
상을 치우는 분주한 손길,
단골손님들과의 대화,
서로를 위로하던 직원들의 미소,
고기가 익어가며 내던 소리와 향기.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이 산산이 흩어지지 않도록
현실의 온도를 유지해 주는 장치였다.
그 시간들은 단지,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동이 아니었다.
삶을 다시 붙잡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었다.
아이를 위해 멈춰 세운 그 일이
돌이켜보니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나는 일을 통해
부재의 고통을 견뎠고,
그 일을 통해
죽음의 그림자에서 하루씩 돌아왔다.
일이 내 슬픔을 완전히 지워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슬픔이 나를 끝까지 데려가지 못하도록
현실의 바닥에 다시 발을 디디게 해 준다.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나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는 힘이었다.
일이 멈추자 그 힘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더 또렷해졌다.
나를 다시 생생하게 깨우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일이었다.
불 앞에서 다시 기운을 얻고,
현실의 온도가 온몸으로 전달되는 그 자리.
그곳에서
나는 무언가를 증명하지도,
극복해내지도 않는다.
다만, 불 앞에 손을 다시 내밀면 알게 된다.
내 삶은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