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곁에 남는다는 선택에 대하여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소소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으로
조금씩 회복해 가는 과정만을 담아보려 했다.
정해진 시간에 몸을 움직이고,
별다른 성과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들.
그런 사소한 반복이 어느 순간,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힘을 주었다.
아이를 등교시킨 뒤, 운동을 한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숨이 가쁘게 차오를 때마다
하루의 시작이 가벼워지고,
몸이 먼저 하루를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서는 봉순이와 산책을 나선다.
예전에는 늦은 퇴근 탓에 친정 아빠가 도맡아 해 주셨지만,
요즘은 그 영광(?)이 거의 나에게 돌아왔다.
엉덩이를 좌우로 성실하게 흔들며
세상 중요한 출근길이라도 되는 양
앞장서 걷는 봉순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데 대해
괜히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게 된다.
덤으로 산책을 끝내고 나면,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의
절반은 이미 해치운 것 같은
묘한 성취감이 따라온다.
그 기세로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준다.
아이를 들여보내고 나면
나는 그 근처에 머물며 아이를 기다린다.
집에서 학원이 멀기도 하지만,
휴직 중인 지금만큼은
이렇게라도 곁에 있어주고 싶은
엄마의 욕심이다.
그 시간에 책을 펼칠 때도 있고,
노트북을 열어 몇 줄이라도 써보려 애쓴다.
기대만큼 진도가 나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했다’는 마음을 남긴다.
그렇게 보내는 평온한 하루들이
나를 조금씩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나는 다시 감사할 수 있었고,
조심스럽게나마 내 삶을 믿어보려 했다.
원래 인생은 이런 걸까.
빛이 보이던 찰나,
다시 한번 시험이 시작되었다.
딸아이가 학교폭력을 신고했다.
학교에서의 무성한 소문들,
더해가는 불안감,
결국 더는 참지 않겠다는 아이의 선택.
이 모든 것을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아이의 불안정함이 급격히 치솟은 이유이자
내가 일을 멈추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날 이후, 나의 일상은 다시 바뀌었다.
잠시 맛본 보통의 하루에서
학폭위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아이의 마음을 살피는 일과 동시에,
기록을 정리하고
대화를 되짚고
증거를 모으는 시간들이 하루를 채웠다.
상처가 시작된 지점에 다시 서야 했고,
가슴 아픈 기억들을 하나씩 확인해야 했다.
마음은 늘 무거웠고,
현실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은 끝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예전처럼 나를 먼저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자책과 걱정이 늘 앞서던 방식에서
나는 조금 벗어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위로와 작은 칭찬을 건네기 시작했다.
아이의 말을 믿어준 것.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던 것.
몸을 움직여 하루를 시작한 것.
책을 펼치고,
한 줄이라도 써보려 애쓴 것.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도
그래도 의자에 앉아 있던
나 자신에게.
대단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알았다.
이 아주 작고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이
나를 다시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다는 걸.
상실을 이겨내는 힘은
거창한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심으로 돌보고
하루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학폭위를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절차는 복잡했고,
그 과정에서 아이가 또다시 상처받게 될까
그게 무엇보다 두려웠다.
이미 충분히 흔들리고 있는 아이를
굳이 더 거친 길로 밀어 넣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이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고,
힘들었던 순간들을 다시 들여다봐야 하며,
그 과정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아이를 또 한 번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아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그랬잖아.
아빠를 잃으면서 겪은 고통에 비하면
세상에 못할 게 뭐가 있냐고.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라면서.
결국 엄마도 딸의 억울한 마음보다,
이런 복잡한 일들을 피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있는 거잖아.
엄마도 사람이니까.
... 그러니까 엄마 같은 사람은 늘 당하고만 사는 거야."
딸이 내뱉은 모든 말이
나의 머릿속을 요동치게 했다.
반박할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동안 내가 붙들고 있던 보호는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다치지 않기 위한 방식이었음을
이제야 들켜 버린 것 같았다.
아이의 말은
상처를 주려는 말이 아니었다.
나를 밀어내려는 말도 아니었다.
그건 질문이었다.
엄마는,
정말 끝까지 내몰린 순간에도
내 곁을 지켜 낼 수 있느냐는.
어디까지가 한계인지를 묻고 있었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이의 시험은 회복의 반대편에 있지 않았다는 걸.
완전히 무너져 있을 때는,
이게 시험인지
구조 신호인지
구분할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다시 살아보려 했을 때,
하루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때,
아이는 비로소 묻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괜찮아진 거냐고.
이래도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느냐고.
그 순간, 이건 더 이상
어떤 선택이 옳은가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끝까지 네 편이라는 것,
그 마음을 흔들림 없이
아이에게 남겨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싸움을 선택했다.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 곁에 남기 위해서.
그날 밤,
고요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해진 자리에서
그저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별다른 성과 없이
하루를 끝내는 일.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