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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G Aug 27. 2021

사람이 싫어서 도망친 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년의 남자는 위태롭다. 전에 없던 뾰족함이 발현되기도 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소파를 점령하기도 한다. 자신감이라는 갑옷은 이제 헐거워졌고 무기는 낡고, 체력은 바닥났다.


중년의 남자는 내 남편이다. 아니, 우리 모두의 남편일 수도 있다. 이십 년을 넘게 해온 직장 일인데 최근 들어 유독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한다. 불합리한 윗선의 명령과 그에 불복하는 아랫선 사이에서 남편은 터지고 또 터진다. 새우처럼 구부정하게 자는 그의 등을 살포시 감싸 안아주는 날이 많아졌다.


남편은 계획적인 사람이다. 즉흥적이거나 예상되지 않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핸드폰 속 달력에는 일정 계획이 빼곡히 적혀있다. 그런 그가 회사에서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일주일 휴가 냈어. 어디든 가자”


'성수기라 숙소도 없을텐데' '코로나 때문에 괜찮을까?' 같은 말이 떠올랐지만 "응, 알았어”라고 깨끗하게 답했다. 군말 없이 가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도 매일 처자식을 위해 회사에 가주고 있다.


여행지는 친정이 있는 남쪽으로 정했다. 아이들은 간만의 여행으로 신이 났고 나 역시 타지의 공기가 콧구멍으로 들어오자 심장이 부풀었다. 남편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세로로 높이 솟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가로로 쭉 뻗은 광활한 대지들이 이어졌다. 그 대지 위에 인가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흘러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평소 하지 못했던 속엣말도 자연스레 나왔다. 남편은 회사 사람들 때문에 힘들다고 토로했다. 사람 마음이 다 자기 같지 않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급작스럽게 휴가를 낸 것도 그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럴 때가 있지. 사람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때, 진심으로 대했는데 상대가 나를 이용한다는 걸 알았을 때, 모두 자기 이익 챙기기만 급급해서 정의를 져버릴 때. 빨간색을 파란색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물쭈물해야 할 때,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워질 때. 남편에게 그런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과감하게 ‘관둬’라고 하지 못하는 아내와 뒷좌석에서 해맑게 장난치는 두 아이를 싣고 남편이 도망치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나는 운전대에 올려진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여행지의 마지막 코스는 친정이었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반가움이 더욱 컸다. 수확철이라 농사일을 도우려고 했는데 비가 많이 내렸다. 엄마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며 몹시 아쉬워했다. 대신 비 오는 날은 전을 부치는 게 옳다며 부추전, 가지전, 호박전을 연신 구워댔다. 후드득 빗소리를 들으며 먹는 전의 맛... 이런 낭만은 오랜만이라고 남편은 감격했다.


엄마는 더 감격스러운 맛을 보여주겠다며 삶은 감자를 내왔다. “나는 감자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고 스윽 발을 빼려는데  엄마가 감자 반쪽을 내 입안에 수욱~하고 밀어넣었다.


"엄마!" 하고 꽥! 소리 지르려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맛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감자는 처음이었다. 남편도 오잉? 하는 눈빛으로 감자 서너 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엄마도 농사 이례 이렇게 맛있는 감자를 수확한 건 처음이라며 자랑에 자랑을 더했다.


남들한테 밉보인다고 자식 자랑도 안 하는 양반이 자신의 감자 자랑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했다. 감자 하나에 저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감자를 먹다가 남편이 말했다.


“어머님, 우리 할 일도 없는데 카페나 갈까요?”

“여보, 이 동네에 카페 없어. 한참 가야 되는데... 비도 오고  집에서 믹스커피 먹자”


내 말을 듣던 엄마가 보란듯이 말했다.

 

“있다 있어! 여기에도 커피집 생겼데이. 빵도 파는데 함 가볼래?”

“뭐라카노 누가 여기서 커피랑 빵을 파노? 말도 안된다”


평균 연령 60세인 작은 시골마을에 베이커리 카페라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만큼 배포 있는 사장님은 또 누구일까?  호기심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한 번 가보자고 몸을 일으켰는데 엄마가 또 부산스럽다.  


“엄마 뭐하노? 빨리 가자”

“아유~ 거기 갈 줄 알았으면 좀 더 삶는긴데... 사장님한테 감자 맛이라도 보일라고”

“엄마, 요즘 사람들 그런 거 싫어해. 부담스러워한다고”

“야야~ 사장님 젊은 사람 아니다. 나이 80이 넘은 분이다”


나의 창의력에 실망하는 순간이었다. 하긴, 젊은 사람만 카페 하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가시지 않은 궁금증을 안고 엄마의 안내에 따라 시골길을 달렸다. 그 끝에는 정말 멀끔한 카페가 우뚝 서 있었다.  ‘진짜 있네..." 신기한 마음으로 문을 당기니 딸칵, 잠겨있었다.


“엄마, 그냥 가야겠다. 문 닫혔어”

“아이다. 기다리 봐라. 사장님 근처에 있을기라.”


엄마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분 뒤 SUV차량이 빗속을 뚫고 우리 앞에 섰다. 손수 운전해온 백발의 여사장님이 터프하게 차에서 내렸다. '여든이 넘었다고 하지 않았나?'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와 사장님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 서울에 있다는 작가 딸? 여는 사위인가? 반갑네 반가워”

“안녕하세요... 여기 정말 좋네요. 이런 곳에 카페가 있으니까 신기해요”


작가적 발동이 걸려 사장님을 캐보고 싶다는 열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남편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가게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엄마는 사장님에게 감자 담은 통을 불쑥 내밀었다.


“사장님 이거 함 잡숴보소, 금방 삶은 긴데 여기 올 줄 모르고 쪼매만 삶아가 요거밖에 안된다.”

“하아 맨날 이런 걸 갖고 오노. 맛있어 보이네”

 


사장님은 유일한 손님인 우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기계의 스위치를 하나 둘 켰다. 저녁시간이 다 돼가는데 우리가 첫 손님인 것 같았다. 사장님은 여든이 넘는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그런 사장님을 향해 남편이 물었다.


“여기 한적하고 조용해서 좋으시죠?”

“에이~ 아인기라. 외려 사람이 그립제. 그래가 이래 누가 오면 반갑고 또 고맙다"

“근데 사장님은 어떻게 여기서 베이커리 카페 할 생각을 하셨어요?”


고새를 못 참고 내가 질문을 퍼부었다.


“이거 하고 싶어가 문화센터 가서 몇 년을 배운기라.”

"힘드시지 않으셨어요?"

"맨날 실패하다 요즘 좀 먹어줄만 하다 카대"

“여기가 고향이세요?”

“아니지. 젊을 적에 이쪽에 땅을 조금씩 샀는데 늙어서 공기 좋은데 살라고 집 짓고 들어왔지. 이 빵도 내가 직접 보리 농사지어서 만든 빵 이데이. 방아도 우리가 찧는다 아이가. 함 무봐."

“이렇게 좋은데...  좀 더 홍보하시면 훨씬 잘되실 것 같아요."

“에이~ 돈 벌라고 하는 거 아니고. 내만 묵기 아까워서, 같이 묵고 싶어서 하는 기라"


그러고보니 이곳엔 메뉴판도 가격표도 없다.


"사장님 커피랑 빵 얼마예요?"

“에헤이!~ 집어넣어. 동네 사람한테 돈 안 받아.”

“저희 외지 사람인데요. 받으세요.”

“안돼 안돼 아지매 딸이면 남도 아니제. 그라고 맛도 없어”


사장님의 만류에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커피와 빵이 나왔다. 유명 커피 전문점처럼 매끈하고 화려한 맛은 아니지만 투박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곧 사장님과 엄마는 수다를 떠느라 바빠졌고 나와 남편은 투명한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와 빵을 먹느라 바빠졌다.


“여보, 참 재밌다 그치? 이 카페도, 엄마도, 사장님도”

그러네...  좋다. 사람들...”



사람이 싫어서 떠난 그에게서 사람이 좋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괜히 뭉클해졌다.  계산 없이 주고받는 사람,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이로움을 나누는 사람,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타인은 지옥'이라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던 남편의 마음이  뭉근하게 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커피를 다 마시고 사장님 몰래 커피잔 밑에 돈을 넣어 놓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장님은 또 자신이 농사 지었다는 보리를 한 포대를 가지고 나와 엄마 손에 쥐어주었다. 그 둘이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고 남편과 나는 마주 보고 웃었다  


"또 와요~"


차 안에서 뒤돌아보니 사장님은 우리차 꽁무늬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날, 엄마는 사장님이 준 보리를 섞어 저녁 밥을 지었고  남편은 그 밥이 맛있다고 한 그릇을 더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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