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자..."
"못 까..."
"아냐, 내 생각엔 까야 해"
"아니라니까."
남편과의 실랑이가 계속됐다. 여야 대립을 방불케 하는 이견 차이로 몇 날 며칠 충돌을 빚고 있다. 그러니까 대체 뭣 땜에? 바로 산타 때문에.
12살, 10살인 아이들에게 '실은 산타는 네가 생각하는 그 산타가 아니란다' 하고 산밍 아웃(산타가 없음을 알리는 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편, 굳이 말하지 말고 그냥 두자라고 주장하는 나. 과연 우리 부부는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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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심을 지켜주고 싶다고 했고, 남편은 작은 아이는 그렇다 쳐도 12살 큰 아이는 은연중에 친구들에게 비웃음과 놀림거리가 될 수 있으니 밝히는 게 좋다고 말했다.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다. 5학년 남자아이가 산타 운운하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어린애 취급당하며 무시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 부부의 이런 논쟁이 무색하게 아이는 진즉에 산타의 진실에 대해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는 체를 하면 선물을 받지 못할까 봐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인지도...
그러고 보니 큰 아이는 올해 산타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산타는 편지로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며 우리에게 넌지시 게임팩을 갖고 싶단 의중을 비추었다. 심증으론 거의 확실하지만 방심할 순 없다.
산타를 믿든 안 믿든, 선물을 받기 위해 믿는 척하는 것도 동심이 아닐까? 나는 그 동심을 지켜주고 싶다. 알 때 알더라도 "너도 이제 다 컸으니..." 같은 말로 쐐기를 박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남편은 쐐기를 박잖다. 불필요한 눈치 싸움이라면서 말이다.
한해 동안 아이가 부쩍 많이 컸다. 이제 외형적인 모습만 봐선 어린이라는 말보단 청소년이란 말이 더 어울릴 정도다. 발 사이즈도 나 보다 더 크고, 키도 나만해졌다. 이마에 여드름도 한두 개씩 나고 변성기도 시작됐다. 누가 봐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아이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나 보다. 내 눈엔 아직도 어린 애고, 더 오래 어린아이였으면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내 마음을 내밀하게 들여다본 순간, 이건 단순히 산타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은 아이가 컸다는 걸 인정하자는 뜻이었고, 나는 좀 더 어린아이로 붙잡고 싶다는 뜻이었다.
영원히 산타를 믿을 것만 같던 아이가 산타 같은 건 없다고 현실적으로 변하는 것이 못내 서글프다. 산타는 어린아이들에겐 울지만 않아도 선물을 주는 인심 후한 할아버지이지만 더불어 부모들에겐 아이의 상상력과 순진무구함을 책임져주는 고마운 인물인 것이다.
"어머니 말이 됩니까? 전 세계에 선물을 받을 어린이가 약 2억 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산타클로스가 방문해야 할 집은 7500만 가구이고, 이 집 간격을 2.6 km라고 보면 이동거리가 1억 9000만 km가 넘는대요. 24일 밤 10시부터 25일 새벽 6시까지는 선물을 모두 돌려야 하니까 시속 818만km, 초속으로는 무려 2272km의 속도로 썰매를 끌어야 하는데, 이걸 믿는다는 게 이상하죠."
<출처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발표논문 중>
이렇게 말하는 아이보다 다음 날 선물을 손꼽아 기다리는 순수한 마음의 아이를 우리는 기대한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따지고 의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공식적으로 사회가 용인하는 산타 판타지 정도는 더 오래 누릴 수 있게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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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영리한데도 왜 산타를 믿는가?'라는 질문에 누군가가 말했다. 부모와 다른 어른들이 산타에 대한 믿음을 너무나 강력하게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지난 10여 년간 우리 부부 역시 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리 사놓은 선물을 들키지 않으려 선반 가장 높은 곳에 숨겨 놓기도 하고, 아이가 받고 싶다던 선물이 품절 상태였을 때 지역구의 장난감 매장을 전부 뒤지기도 했었다.
아이 몰래 선물을 가져다 놓은 후, 다음날 시치미를 떼야 하는 발연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이 크리스마스가 오면 이 번거로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내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나는 산타가 외국의 어느 할아버지의 이름이 아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의 이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아이가 놀림받고 소외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내가 굳이 입 밖으로 산타의 존재를 알리지 말자고 하는 것도 산타라는 이름의 마음이다. 고로 산타는 진실로 존재한다는 사실...
이런 상념에 빠져 있던 중 남편이 반칙수를 던졌다. 의견을 타협하기도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네 친구들은 산타한테 무슨 선물 달라고 했대?"
속이 보이게 넌지시 운을 띄웠다.
"우리 반에 산타 믿는 애들 없을 걸?"
"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난... 음..."
나도 아이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믿는 사람한텐 있고 안 믿는 사람에겐 없겠지."
이건 무슨 바람 빠지는 소리야~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아 실망할 때쯤 아이가 말을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승아 동심은 내가 지켜줄게."
잠시 침묵... 남편과 나는 서로를 벙찐 눈으로 쳐다보았다. 녀석 다 알고 있었구나. 예상대로 그랬었구나... 이렇게 남편과 나의 논쟁은 허무하게 귀결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슬프지는 않았다. 비록 산타를 믿는 귀여운 아이의 시절은 가버렸지만 동생의 동심을 지켜주며 스스로 산타의 마음을 가질 줄 아는, 제법 커버린 아이를 보는 것도 좋았으니까.
산타의 마음으로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