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수학과 썸을 타고 있다. 매일 아침, 복잡하게 생긴 수학 문제와 마주한다. 벌써 보름째 이 같은 루틴을 이어가고 있다. 사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을 준다는 것도 아니고 수능을 볼 것도 아닌데 순전히 나의 자의로 수학 공식을 외우고 식을 쓰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니. 이런 내가 낯설다.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닌 수학과 중매를 맺어준 것은 다름 아닌 아들이다. 아들은 숱한 나의 장점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나의 수학 머리를 닮았다. 그런 탓에 13살(예비6학년)에 '수학 증오자'가 됐다. 수학이란 말만 나와도 기겁을 하고 수학 문제집을 펼 때마다 "대체 수학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며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이렇게 수포자의 길을 대물림할 순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내가 먼저 수학과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싫지만 너는 어떻게든 좋아해 보라고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다. 우선 나부터 수학과 쌓인 오해를 풀고, 아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우선 내 수학 수준부터 점검해 보았다. 5학년 아이의 문제집을 슬쩍 훑어보니 헉!!! 요즘 5학년이 이런 걸 배운다고?! 아이에게 수학 점수를 타박한 것을 반성했다. 나의 수학 수준은 초등 과정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겁이 났다. 아이의 수학을 구하러 뛰어들었다가 다 같이 폭망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했던가. 엄마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저도 느끼는 바가 있겠지... 싶어 다시 한번 정신을 부여잡고 수학에게 손을 내밀었다. 학창 시절엔 내가 먼저 손을 놓아버렸지만 이번엔 다르다. 내 아이의 수학 명줄이 달린 문제다. 어떻게든 부여잡아보자고 굳건히 다짐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소금과 물을 섞기 시작하면서, 달리는 기차의 속도를 물어볼 때부터 나는 수학이 싫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물에 소금을 섞고, 기차의 속도를 묻는 유형의 문제들을 보면서 안 좋았던 옛날 기억들이 떠올랐다. 약은 약사에게 수학은 수학 선생님에게 라는 슬로건을 떠올리며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모성은 생각보다 강했다.
내가 수학에 관심을 가지고 검색을 하기 시작하자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수학인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같이 수학 공부해요.' '성인 수학 환영합니다.' '수학 챌린지 인원 모집' 같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문구들이 사방팔방에서 발견됐다.
그들은 전문 수학자, 선생님도 아닌 주부, 회사원, 학생 등...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수학을 좋아하는 이유도 가지각색.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수학 문제를 풀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이부터 아이를 직접 가르치기 위해, 심지어 수학 문제 풀이가 취미라는 사람도 있었다. 성인 수학을 위한 학습지와 선생님도 따로 존재할 정도라니. 순전히 자기 만족을 위해 수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 그들은 전설 속 유니콘이 아니었다. 실존 인물이었다.
그들의 조언을 길잡이 삼아 초보 입문용으로 많이 추천하는 초등 수학 문제집을 구입했다(전체 초등 수학 개념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려고 풀기 시작했는데 보름 만에 현재 5학년 2학기 부분을 하고 있다). 이제 나를 지도할 선생님만 찾으면 된다. 성인 학습지 선생님을 모실까? 아니면 단톡방에 수학 문제 풀이 인증샷을 올리고 서로 틀린 문제를 봐주는 챌린지 모임에 참석할까? 그러다 결국 내 무식의 수준을 들켜도 창피하지 않을, 우리 집 유일의 이과형 인간,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아니~ 소금에 물 좀 섞지 말라 그래. 농도는 맛을 봐야 아는 거지, 뭘 숫자로 구해."
"아니~ 정말 미치겠네. 마트 가면 할인된 가격으로 계산해 준다고~ 할인율이 얼만지 나한테 안 물어보면 좋겠다."
이런 나의 투정에, 남편의 표정은 나날이 지쳐갔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조금씩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초등 수학은 묘하게 존심을 긁는 부분이 있어서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도 알 것 같은 진짜 썸남의 마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회사에 간 남편에게 문제 풀이를 부탁하는 중 나의 무식함을 들켜도 창피하지 않는 유일한 선생님
남편과 달리 나의 지적 호기심(?)은 나날이 늘어났다. 덕분에 꽁꽁 숨겨온 나의 무식함은 세상에 여과 없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남편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정말 몰라? 진짜 몰라?"라고 말하며 내 지성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수학이란 게 참 신기한 구석이 있었다. 답을 내어주지 않을 땐 발로 뻥 차 버리고 싶다가도, 같은 방법으로 다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자 '어쭈?' 싶은 마음이 들면서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츤데레 한 부분이 있었다. 인생엔 정답이 없지만 수학만큼은 명확한 답이 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그 명쾌한 해답의 맛을 사십여 년 만에 처음 알게 됐다.
수학의 가장 큰 강점은 문제를 풀다 보면 잡생각이 없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복잡할 때 연필을 쥐고 하나하나 문제의 실마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고민은 옅어지고 문제의 해답을 찾는 데만 온 신경을 쓰게 된다. 그리고 수학 문제의 답이 딱 떨어졌을 때의 그 쾌감, '아, 바로 이거구나!' 싶은 그 맛은 중독성까지 있었다.
또 채점을 할 때 동그라미가 많은 시험지를 보면 왠지 스스로 칭찬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물론 빗줄기가 그어질 때는 정신이 바짝 들지만 말이다. 물론 아직까진 초등수학에 국한된 이야기다.
조금씩 수학의 즐거움을 알게 될 때쯤 이 기분을 아들에게도 꼭 알려주고 싶었다. 수학이 우릴 망치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인상 진상 오만상을 하고 문제를 푸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야말로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을 벌 것도 아니고, 수능을 볼 것도 아니므로 여유를 가지고 문제를 풀 수 있지만 과연 아이는 그럴 수 있을까?
실제로 주변 친구들은 선행으로 중등 수학을 공부하고 있고, 중학교 과정을 다 뗐다는 아이도 있을 정도다. 그 경지에 이르려면 아이는 하루에 한 자리에 앉아 수 백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 부모가 밀어붙이지 않아도 주위 환경이 아이를 옭아매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그런 와중에 수학의 기쁨을 운운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은 생각에 나는 옴싹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포 대포 영포 인포(수학을 포기하면 대학을 포기하고 영어를 포기하면 인생을 포기)'라는 말을 들으며 죽기 살기로 수학과 싸우는 중인 아이들... 아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그것을 좋아할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나처럼 수학의 즐거움을 찾는 데 수십 년이 걸리면 곤란하다.
수학의 즐거움을 손수 찾아내 아들의 수학 흥미를 끌어보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시작한 도전이었지만, 하다 보니 진심으로 예전만큼 수학이 싫지 않고 정복해보고 싶은 경지에 오르게 됐다.
아이에겐 지금껏 별말하지 않고 있다. 그저 매일 아침, 수학을 진지하고 흥미롭게 대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줄 뿐이다. 원래 남이 하는 게 더 재밌어 보이는 법. "수학이 저렇게 재밌다고?"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아이의 꺼져가는 수학 불씨를 되살릴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기다려 줄 용의가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