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개키다 화딱지가 났다. 매년 크는 아이들은 시기별로 옷 갈이를 해줘서 그런지 옷들이 모두 보들보들하고 예뻤고, 남편은 회사에 나가는 사람이라 대부분 점잖은 옷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 옷이 문제였다. 말이 옷이지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형태의 것들. 무릎 부위는 불룩하게 나와 있지, 보풀은 잡초처럼 번져 있지, 목 주위는 헤지고 늘어졌지, 심지어 빵구가 '뽕' 하고 나 있는 것도 있었다.
'초라하다 초라해...' 괜히 심통이 나서 개키던 옷을 세게 내리쳤다. 생각해 보니 언제 옷을 샀는지 기억이 까마득했다. 한때 옷 사는 재미에 빠져 스파 브랜드부터 인터넷 마켓, 오프 매장 가릴 것 없이 맘에 드는 옷을 발견하면 우선 사고 보던 시절도 있었는데... (사놓고 안 입은 옷도 상당수)
ⓒ ㈜쇼박스
코로나가 시작되고 옷 사는 재미가 가장 빨리 사라졌다. 모름지기 새 옷을 입는 맛이란 <미녀는 괴로워>의 김아중처럼 또각또각 걸으며 괜히 머리도 한번 찰랑해주며 내 멋에 취하는 기분인 것을. 그리고 누군가가 패션 센스를 칭찬해주면 자존감이 팍팍 올라가 턱을 뻗쳐 드는 기분인 것을. 수년간 코로나로 인해 거리를 걸을 일도, 누군가의 패션 칭찬을 기대할 일도 없는 상황에서 새 옷을 사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게다가 미니멀리즘이다 뭐다 해서 한 번 입고 처박아 놓은 옷을 버리는 것도 자원 낭비 같고, 그럴 바에야 쇼핑 에너지를 충전해 다른 곳에 쓰자는 결론에 이른 나는 더 이상 옷을 사는데 시간과 돈과 투자하지 않게 되었다.
입고 나갈 일이 없으니 예쁜 것보다 점점 더 편한 옷을 찾기 시작했다. 옷은 친구 같아서 오래되면 될수록 편한 법. 목이 늘어난 후줄근한 티셔츠에 구멍 뚫린 옷, 건조기에 돌려서 작아진 남편 옷, 친정에 갔다가 딸려온 엄마의 난해한 패턴 파자마... 볼품은 없지만 인체 공학적으로 훌륭한 옷들이 어느새 나의 교복이 돼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지금 내겐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더 맞는 말 같았다. '겉만 번드르르 한 사람이 되지 말자', '외면보다 내면이다' 같은 말을 심지처럼 마음 중심에 꽂고 살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외면을 돌보지 않자 나의 내면도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보여줄 사람도 없고 입고 나갈 일도 없다고 기능에(가리기) 충실한 옷만 입었더니 나 역시 생존 기능에만 맞춰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거적때기 옷에 화장이 어울릴 리 없으니 선크림도 겨우 발랐고 거적때기 옷에 헤어스타일이 무슨 소용이냐 싶으니 매번 질끈 묶는 게 다였다. 옷값이 줄어서 좋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 않아서 좋고, 자원을 아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거울 앞에서 제대로 타격감이 왔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같은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 거울도 혀를 끌끌 차대는 내 모습에 종종, 자주, 문득 시무룩해지곤 했다
재킷을 유독 사랑하는 친구가 있는데 어깨 뽕이 들어가고 각이 잘 잘 잡힌 재킷을 입으면 뭔가 자신감이 폭발하는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당시엔 이해를 못 했지만 이제야 그 친구의 마음이 무엇인지 짐작이 될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자신감 뽕이 장착된 재킷을 로켓 배송으로 배달시켜 입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재킷을 입고 설거지 하고 밥을 하고 분리수거를 하러 나갈 수는 없는 일. 친구의 재킷처럼 나의 자존감에 날개를 달아줄 옷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잠옷이다. 티브이 관찰 예능에서 연예인들이 예쁜 잠옷을 입고 혼밥도 하고 파티를 하는 곳을 보고 '바로 저거다' 싶었다.
나는 잠옷 쇼핑에 나섰다. 어머나... 세상에... 입고 자기만 해도 예쁜 꿈을 꿀 것만 같은 잠옷 세계의 커튼이 촤르르 열렸다. 잃어버렸던 쇼핑 감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소재, 디자인, 가심비까지 꼼꼼히 따져 가장 맘에 드는 잠옷을 골랐다.
▲ 나의잠옷컬렉션 예쁜 잠옷을 입고 가장 나다운 내가 된다
잠옷 효과는 상당했다. 그간 홈웨어와 잠옷의 경계를 두지 않고 두루두루 활용했던 나는 잠옷을 입고 벗는 것으로 하루의 시작점과 끝점을 만들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 놓고 깨끗이 씻은 뒤 예쁘고 편안한 잠옷을 갈아입는다.
그때부터 집안일에서 분리되어 그 시간부턴 오롯이 나를 위한 것들에 집중한다. 책을 읽거나 우아하게 차를 마시거나 명상을 한다거나 (실은 유튜브 보고, 야식 먹고, 애들 밀린 숙제시키고...) 똑같은 행위를 해도 거적때기를 입고 하는 것과 예쁜 잠옷을 입고 하는 행동은 다르게 느껴졌다.
아이에게, 남편에게, 좋은 옷을 입히는 것만큼 나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대접해주니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 커졌다. 특히나 잠옷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나의 취향을 담아내기 좋은 의복이다. 그래서 잠옷을 고를 때 나는 조금 과감해진다. 비비드 한 컬러를 고르기도 하고, 화려한 패턴의 디자인을 고르기도 하고 꽃무늬 잠옷(숨겨온 나의 취향)을 고르기도 한다. 나도 나지만, 아이들과 남편의 반응도 뜨거웠다.
"엄마, 나도 엄마랑 같은 커플 잠옷 입고 싶어."
"여보, 진작에 이렇게 좀 입지... 예뻐."(언젠 거적때기를 입어도 예쁘다며!)
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었다. 아이들도, 남편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거울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보고 있었다. 그간 눈 공해를 일으킨 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나는 지금도 틈틈이 예쁜 잠옷을 고르고 있다
지아니 베르사체 명품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가끔 나 자신에게 묻곤 합니다.
'옷'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죠.
그때마다 저의 대답은 같습니다.
나를 나 자신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요.
나를 나 자신일 수 있게 하는 옷... 그것은 베르사체의 명품 옷도, 친구의 멋진 재킷도 아니다. 지금 나에겐 잠옷이다. 말끔하게 잠옷을 잘 갖춰 입고 스스로 만족스러움에 빠지는 그 순간,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글을 쓰고 가장 편안한 내일의 꿈을 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