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주가 누굴까? 그토록 열심히 추리했건만...
'자식은 믿는 만큼 자란다'라고 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라고 묻는다면 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쪽에 더 맘이 기운다고 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부모의 믿음만큼 자라주었는가 생각해보면 글쎄, 발등을 찍은 날이 더 많지 않았을까?
중3 아들이 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알 길이 없다. 사고나 치진 않을까 늘 노심초사.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타입도 아니고, 꼬치꼬치 캐물을라 치면 '알아서 할게요'라고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기 일쑤다.
남편은 가끔 아들의 용돈 통장 앱을 살펴본다. 1월 3일 4시 15분 00 편의점 핫바 2500원, 1월 4일 오후 5시 00 베이커리 1500원, 1월 5일 00커피 오후 4시 18분 아이스티 3800원, 돈 쓴 흔적을 보면 아이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추리가 가능하다. 실제로 연락이 안 될 때 통장을 살피면 동선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그리고 간혹 의심쩍은 상황과 마주하게도 된다.
"여보, 이거 한 번 봐봐. 이 자식, 수상해."
"뭐가?"
"여기 7시 6분에 2천 원 찍혔잖아. 근데 8시 14분에 또 2천 원 찍혀있어. 그런데 오늘 뿐만이 아니야. 일주일 동안 계속 비슷한 시간대에 이체가 됐어."
"가만 있어봐. 그 시간대면 영어 학원에 있을 시간인데?"
"게다가, 현금 이체야."
"누구한테 이체한 건데?"
"서O희."
"어? 서O희가 누구지?"
남편은 셜록 홈즈의 추리력을 뽐내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나갔다.
"내 생각엔 여친인 것 같아."
"무슨 여친?"
"우리한텐 비밀로 하고 100일 통장 뭐 이런 거 만든 거 아닐까?"
"여친 생기면 말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커플 통장이면 하루에 2천 원씩 보내자는 합의가 있었을 텐데 하루에 두 번씩 보낼 이유는 뭐야?"
"...뭐지?"
남편과 나는 미궁에 빠졌다. 나는 나대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혹시... 우리 아들, 괴롭힘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웬 괴롭힘???"
"뭔가 빌미를 잡힌 거야. 그래서 걔네들이 요구하는 걸 들어줘야 하는 상황이고."
"설...마."
"서O희라는 무리 애들한테 빌미가 잡힌 게 확실해. 학원도 빼 먹고."
남편과 나는 심난해졌다. 아이에게 캐묻는 것도 사실 걱정이 됐다. 남편은 말하지 말고 지켜보자는 쪽이었고 나는 문제가 커지기 전에 전후 사정을 확인하자는 의견이었다. 한번 피어난 상상력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만약에...'라는 꼬리까지 물게 되자 머리에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돌아왔다. 아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괜히 아들 주위를 뱅글 뱅글 돌았다. 날씨 얘기도 했다가, 학교에 뭔 일 없냐는 얘기로 떠 보기도 했다. 아들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아무 일도 없는데?" 라고 심드렁하게 답할 뿐이었다.
입이 바싹 바싹 마른 나는 더 이상 돌려 말하길 포기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서O희가 누구야?"
"서O희가 누군데?"
아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 다 알고 있어. 솔직히 말해."
"진짜 모르는 이름인데?"
"거짓말 할 거야? 학원은 또 왜 안 간 거야?"
"나, 지금까지 학원에 있다 왔어."
억울해 하는 아들의 말투에 남편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사실대로 말해. 여친 생겼어?"
아들은 토끼 눈을 뜨고 아니라고 했다. 누가 괴롭히냐고 묻자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그렇다면 결정적 증거를 들이밀 수밖에.
"너, 이거 봐봐. 영어 학원 가있을 시간에 매일 2천 원씩 누구한테 갖다 바쳤냐고!"
참고 있던 나의 언성이 단번에 높아졌다. 아들은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답을 찾지 못한 눈치였다. 그때. 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듯, 마구 웃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왜 저래?'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하하하하하. 엄마, 여기 이체 시간 좀 봐봐. 이 시간은 영어 학원 쉬는 시간이고, 이 시간은 영어 학원 끝나는 시간이야."
"그런데?"
"우리 학원 1층에 붕어빵 아줌마 이름이 서O희인 것 같아."
"응?"
"거기 붕어빵이 진짜 맛있어.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먹고, 올 때도 사 먹는데, 카드가 안 된다고 해서 이체 시킨 거야. 피붕(피자 붕어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저녁도 못 먹고 학원 가는데 얼마나 배고픈 줄 알아?"
궁지에 몰린 남편과 나는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아... 배가 많이 고플 시간이긴 하지."
아들이 우리를 흘겨보며 말했다.
"근데 엄마, 아빠 나 의심한 거야? 나쁜 짓 하고 다닐까 봐? 너무 한 거 아니야?"
"아... 아니... 그게 아니... 라."
"그리고, 서O희. 내 여친이라기엔 이름이 좀 올드하지 않아?"
"크흠... 그런...가."
우린 멋쩍은 듯 아들에게 웃어 보였다. 남편은 자신의 추리력에, 나는 나의 작가적 상상력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래서 우린 탐정도, 대 작가가 되지 못하나 보다. 발등 찍는 사춘기는 생각했지만, 배고픈 사춘기는 생각하지 못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온 아이에게 시답잖은 의심이나 하다니. 미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 날. 나는 고기 반찬으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그동안 괜한 의심과 걱정의 눈초리로만 아이를 바라본 건 아니었을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까 봐 앞서 걱정하기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교훈적인 이야기......는 아니고 사춘기 부모님들, 지나친 상상력은 정신 건강에 해롭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도 의심하고 싶지 않다. 책 밑에 핸드폰 숨겨둔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