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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G Mar 21. 2021

엄마, 전화하지 말고 그냥 배달앱으로 시켜

아이가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졸랐다. 배달음식을 잘 시켜먹지 않아 어느 곳이 맛있는지 모른다. 아이와 함께 중국집을 검색했다. 그중 적당한 중국집을 찾아 전화를 걸려고 하니 아홉 살 아이가 “엄마, 배달의 00으로 시켜”라고 말한다. 아홉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생경해 '푸핫' 하고 웃음이 나와 버렸다. 내 아이의 유년시절이 괜히 새삼스럽다. 배달은 어플로, 수업은 화상으로, 대화는 AI로... 아이는 당연한 시절을 지나고 나는 생소한 시절을 지나고 있구나...  


나는 고등학생 이전까지 배달 음식을 접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마트도 없던 시골 동네에서 살았는데 배달음식은 언감생심이었다. 당시엔 당연했는데 지나고 보니 정글의 법칙에 나오는 오지 같은 데서 내가 살다 왔나 싶을 만큼 어색하다.


유년의 정서는 꽤 오랫동안 우리 몸에 축적돼 있어 어른이 돼서도 내가 하는 행동,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나는 배달의 천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어색하다. 더군다나 사람의 설명이 아닌 기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낯설다. 고딕체의 '주문이 완료됐습니다'는 몇 번을 봐도 의심스럽다. 진짜 주문이 된 걸까? 나는 전화로 다시 확인을 한다. "주문 잘 들어간 거 맞나요?"  가게 점원의 목소리로 확인을 받은 후에야 안심이 된다.


그런 나를 보면 아이는 또 재밌다고 깔깔대고 웃는다. 이게 그렇게 웃긴 일인가? 생각하다 문득 키오스크 앞에서 울어버렸다는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가 가슴에 날아와 꽂힌다. 나도 곧 이 시대의 문명에 어쩔 줄 몰라하게 되는 것일까? 조금 두려워졌다.  


내 친구는 슈퍼집 딸이다. 지금은 장사를 접었지만 당시엔 동네에서 꽤 큰 슈퍼였다. 10대 후반 설익은 나이의 나를 떠올리면 어김없이 그 슈퍼가 떠오른다. 나는 매일 같이 친구와 슈퍼 의자에 앉아 뭘 할지 몰라하는 할머니처럼 하루를 흘려보냈다. 시골 마을의 슈퍼는 원리원칙이 없다. 필요한 사람이 직접 와서 물건을 사가는 곳이 슈퍼지만 전화로 누군가 '배달은 안될까요?' 하면 또 안된다고 못하는 것이 동네장사란 것이다.


나와 친구는 종종 물건을 배달하러 갔는데 그 물건은 각종 생필품에서 음식재료까지 다양했다.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 팔을 휘이휘이 흔들며 가는 동안 우리는 조금 설렜다. "빨리 가야 해" "늦으면 안 되는데..."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귀찮았던 마음보다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받는 이의 기쁨이  상상되어 더 좋았다. 물건을 전달하면 다 아는 동네 어른들이라 심부름해준 게 고맙다며 동전 몇 개를 더 주기도 하고, 간식이나 농작물로 고마움을 표하는 이웃도 있었다. 고마움이 느껴지는 눈빛과 표정에서 '정'이란 게 이런 거구나... 어렴풋이 체득했다.

참 많은 배달원들을 본다. 내가 거니는 곳곳마다 배달원이 오간다. 도로에도, 거리에도, 엘리베이터에도...

저마다 모두 바쁘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짐작한다. 바쁘고 고된 표정 속에서도 전달하는 이의 기쁨과 책임을 본다.  자기 감상에 빠진 소리래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은 믿는 대로 보이는 법. 나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부엉이도 전보를 전할 때 기쁨의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이제 배달원의 기쁨이나 마음 따윈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만 오면 그만 인 것이다. 배달 심부름을 하던 아이에서 배달받는 것이 익숙한 어른이 되었다. 간식이나 동전 몇 개로 정을 표현할 순 없겠지만 '감사하다'는 말쯤은 전하는 어른이고 싶다. '수고하십니다'라는 말 대신 그에게 줄 수 있는 별점은 몇 점일까? 나는 아직 모르겠다.


주문한 자장면이 배달됐다. 언택트 시대답게 배달원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아이는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자장면을 먹었고, 나는 말없이 후르릅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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