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조이 Aug 27. 2022

그날의 기억

'비포 선셋'과 파리의 거리

그날은 이상하게 운이 없는 하루였다.


다년간 여행을 다니면서, 자유여행이라는 것이 항상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몸으로 경험하여 잘 알고 있었다. 설레는 유럽 여행의 시작, 베이징 환승을 거쳐 드골 공항에 아침 일찍 도착했다. 장거리 비행에 지친 나는 힘겹게 예약해둔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했다. 내 첫 번째 에어비앤비 경험이었는데, 성수기 파리 숙박비가 워낙 비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 나는 파리에 하녀 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증축을 거의 할 수 없는 파리의 주거 특성상 과거 하녀들이 머물렀다는 건물 꼭대기의 하녀 방은 역시 싼 게 비지떡인 것처럼 좁고, 덥고, 열악했다.


체크인을 위해 연락했던 주인 할머니 Anne은 얼굴도 보지 못했고, 통화로 하는 영어 대화는 거의 소통을 할 수 없었다. 화분 밑 숨겨둔 열쇠로 꼭대기층까지 대형 캐리어를 땀을 뻘뻘 흘리며 들고 올라갔다. 첫날은 특별한 일정없이 쉬고 싶었는데, 하필 그때 파리는 유럽 전체가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여름이었기에, 에어컨이 없는 숙소에서 도저히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다. 급하게 만나기로 한 동행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파리 구경에 나섰다. 그 시작이  운이 없었던 그날 하루를 예고하는 듯했다.


그래도 처음 여행하는 파리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도핑하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동행하기로 한 친구를 만나서 열심히 짜둔 계획을 하루 앞당겨 유명 관광지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 향한 곳은 오랑쥬리 미술관이었는데, 미술을 잘 모르는 나도 수련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힐링이 되었다. 조금 기분이 좋아졌고 '그래 이게 여행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묘하게 운이 없었던 그날은 역시 날 그대로 두지 않았다. 내가 너무 멍 때리며 구경을 해서 소매치기를 당한 것인지 아니면 떨어지는 것도 몰랐는지 그날 가지고 나온 파리 시티 패스와 현금을 잃어버렸다. 날은 덥고, 몸은 힘들고,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같이 여행을 하던 동행친구에게도 괜히 심술이 났다. 우선은 현금을 빌려줄 테니 다음 코스인 루브르 박물관을 계획대로 보자는 친구의 호의를 거절하고, 이런 날은 쉬어야겠다며 다시 숙소로 향했다.


여기서 운이 없었던 그날 하루의 클라이맥스가 시작됐다. 숙소에서 나올 때 너무 정신이 없어 키를 두고 문을 잠그고 나와버린 것이다. 너무 바보 같은 짓이었는데, 그때는 너무 지쳐있어 스스로 자책할 힘도 없었다. 호스트인 Anne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아무리 연락을 시도해도 에어비앤비 메시지나 전화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숙소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니 다 큰 성인 남자인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돈도 없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숙소도 없고, 동행친구에게 심술까지 부린 내가 너무 초라해서... 그날은 너무 운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 여행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파리를 빨리 떠나 다음 여행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돈도 없고 행선지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걷는 것뿐이었다. 그때 내 숙소가 Saint-Paul역 근처에 있었는데, 심통난 기분으로 주요 관광지들이 몰려있는 서쪽 도심으로 가기가 싫어 무작정 동쪽으로 걸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얼마 걷지 않았는데, 예쁜 붉은 벽돌 위 고가 도로가 하나 보였다. 처음 계획했던 코스에 있던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쁜 길을 따라 걸으면서 노래를 듣고 있으니 꽤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가 저녁 시간쯤이었는데 여름에 유렵은 정말 해가 늦게 지므로 저녁 인지도 모르고 거기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조금 마음을 정돈하고 보니, 오늘 잠을 잘 숙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Anne은 연락이 닿지 않았고, 급한 마음에 주변 호텔을 찾아봤는데 정말 비싸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곳들 뿐이었다.

그때 동행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상황을 들은 그 친구는 자기 일처럼 걱정을 해주며, 정말 쉽지 않은 제안 먼저 해줬다. 아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자기 숙소에서 하루를 지내도 된다는 눈물나게 고마운 제안이었다. 이런 좋은 사람에게 내 컨디션을 관리하지 못해 심통을 부린 내가 너무 창피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그 친구 숙소에서 하루 신세를 졌다. 잠 못 드는 밤, 그 친구와 정말 깊은 이야기를 오랜 시간 나눴다. 원래는 하루 스쳐가는 당일치기 동행이었야 할 인연이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운이 없는 하루였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을 알게 된 건 꽤 큰 행운인 것 같았다.


'비포 선셋' 스틸 컷


다음 날 아침 신세 진 게 미안해서 아침에 먼저 일어나자마자 구글 맵을 키고, 카드가 되는 가까운 cafe를 검색해 찾아갔다. 아침 8시에도 문을 연 모퉁이 빨간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카페였다. 커피와 빵을 주문하고 기다리며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는데, 이제는 완전히 힐링되는 기분이 들었다. 여유가 생기자 뒤늦게 어떤 카페인지 알고 싶어 구글로 찾아보니 그제야 게 되었다. 여기가 내 인생 영화 '비포 선셋(2004)'에 나왔던 바로 그 Le Pure Cafe라는 것을! 동행친구에게 이 신기한 우연 호들갑 떨며 이야기했더니, 그 친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비포 선셋을 좋아해서 11구로 숙소를 잡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영화 장면들을 캡처해서 지도로 만든 것을 보여줬는데, 내가 어제 걸었던 고가 산책로가 비포 선셋에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가 함께 걸었던 길이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이 고가 산책로의 이름은 '프롬나드 플랑테'로 파리의 도시 재생 사업 일환으로 조성된 산책로라고 한다.)


이 사실들을 알게 되니 너무나 운이 없었던 하루가 '오히려 좋은' 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로맨틱이라니! 그리고 친구와 같이 비포 시리즈를 돌려 보면서 서로 일치하는 영화 취향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 속 로케이션을 함께 데이트했던 것은 원래 계획이었으면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프롬나드 플랑테(출처: 위시빈)


비포 선라이즈를 시작으로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지는 비포 시리즈 3부작은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손에 꼽는 인생 영화라 따로 부연 설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실제 소울메이트라는 두 배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세 사람이 근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통해 완성시킨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그들이 걸었던 거리를 따라 걸을 때 사랑, 청춘, 나이 듦, 열정, 낭만에 대해 진지한 성찰과 몰입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마력 같은 힘을 지녔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 로케이션을 이야기할 때 첫 번째로 꼽는 것도 아마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명작 '비포 선셋'과 진부할 정도로 클리쉐적인 파리 거리에서 내가 보낸 하루를 굳이 소개해야 할지 사실 고민이 많았다. 그래도 이 날의 경험이 내가 영화 로케이션 여행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에 글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비포 선셋 영화에서 9년 만에 다시 만난 제시와 셀린느는 둘이 처음 만났던 유럽 횡단 기차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의 하루를 조금씩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 함께 보낸 시간이지만 각자 처한 상황과 시선으로 그날을 바라보니 조금씩 기억이 변했을 것이다. 마치 내가 파리에서 처음 보냈던 그날을 지금은 다르게 기억하는 것처럼.

 

돌이켜보니 그날은 이상하게 운이 좋은 하루였다.


(+ 그날 오후에야 호스트 Anne에게서 연락이 왔다. 노년의 그녀는 갑자기 몸이 너무 좋지 않아, 아무런 연락을 할 수 없었다며 너무너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파리의 로컬이 아니라면 갈 수 없는 최고의 빵집에서 에끌레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맛있는 빵들을 사들고 와 선물로 주었다. 또 하루 잠들지 못한 것을 숙박비에서 빼주겠다며 몇 번이나 나에게 사과를 했다. 열쇠를 두고 온 것은 내 잘못인데 그렇게 까지 친절하게 대해주시니 진짜 고향에 있는 할머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파리를 떠나기 전날 Anne은 자차로 내가 혼자 여행을 했으면 갈 수 없었을 파리 남쪽의 쏘 공원(Parc de Sceau) 피크닉도 시켜주셨다! 이 또한 운이 좋은 하루였다는 증거!!)




<'비포 선셋' 추천 포인트>

1) 비포 시리즈에 대한 추천은 너무나 많아서, 개인적으로 비포 시리즈를 즐기는 방법을 하나 공유한다. 비포 시리즈는 신기하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좋아하는 시리즈가 변하는데, 20살에 나는 비포 선라이즈를 가장 좋아했고, 30살에 나는 비포 선셋을, 그리고 지금의 나는 비포 미드나잇을 가장 좋아한다. 시리즈를 순서대로 보는 것도 재미가 있지만, 비포 미드나잇부터 거꾸로 영화를 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가 있으니 이미 영화를 보셨던 분들은 거꾸로 시리즈를 보는 것도 추천한다.


작가의 이전글 째~즈란 말이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