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스 찬양

전국민에게 테라스를!

by 조성현

테라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밖도 아니고 안도 아닌, 그 중간을 매개하는 속성이 좋았다. 공기로 치자면 분명히 바깥인데, 영역으로 보자면 다른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 잠옷 바람에 슬리퍼 하나 신고 나와도 눈치 볼 것 없는 그 자유로움을 원했다.


아내와 집을 보러 다닐 때마다 테라스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문제는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에서는 테라스의 개념은 없었다는 것이다. 유럽에 가면 다들 테라스 하나씩은 있던데... 그렇다고 거기도 안 덥고, 안 추운 것도 아닌데 왜 한국은 테라스가 없을까. 그나마 있는 베란다도 없애버린 집들도 부지기수다. 늘 그게 아쉬웠다.

호텔에 테라스가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몇 년 전에 구기동의 어느 빌라를 보러 갔던 적이 있었다. 길쭉하게 남은 자투리 땅에 지어진 건물은 역시 길쭉하게 지어져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었다. 땅의 모양이 넓은 사각형이 아니었던지라 집의 구조가 특이했다. 가로로 긴 복도가 자리하고, 한 쪽 끝에는 큰방, 그 반대끝에 작은 방들이 세 개 모여있었다. 구조가 흡사 우주선 같았다.

지금 봐도 신기하게 생긴 집. 이 집에 강한 호감을 느껴서 인터넷에서 구조도까지 구했다.


집의 구조는 아무래도 좋았는데,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복도 곁에 붙어있던 베란다였다. 그 밖으로는 건너편 전원주택 마당에서 높게 솟은 나무가 보였다. 거기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나무를 바라보는 상상을 했다. 나는 순간 유러피안이 되었고 심히 흡족했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계약할 뻔 했다.


그 앞에 있는 구기터널을 오가는 차소리가 생각보다 소란스러워서 결국 그 집은 포기했지만, 내 테라스에 대한 갈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집을 봐도 테라스가 먼저였다. 그러다 지금의 우리 집(정확히는 같은 동의 다른 집)을 발견한 것이다.


그 집은 연로하신 할머니 혼자 지내시던 집이었다. 베란다가 유난히 널찍했다.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편안한 의자가 두 개 놓여있었다. 창 밖으로는 산이 있어 바라보기 좋았다. 아내와 그 집을 나서서 말했다. "여기다. 여기야."


누군가 그랬다. 집을 만나는 것은 운명같은 거라고. 보다보면 여기다, 싶은 데가 나온다고. 무슨 고리쩍 러브스토리의 "만나는 순간, 아, 이 사람이다 싶었어요!" 같은 대사 같아서 '그런 게 있을라고...' 하며 치부했었다. 그런데 정말 만나버린 거다. 운명의 집을.


이 집은 저층이어서 최종 탈락했지만, 이 아파트를 고르게 된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테라스의 제철은 아무래도 봄이랑 가을이다. 찰나 같이 지나가는 계절이라 서운하다. 그렇다고 여름과 겨울에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여름은 더워서 좋고, 겨울은 추워서 좋다. 오히려 외창이 있는 한국형 베란다라서 사계절 모두가 제철이다. 그러고보니 역시 실용의 나라, 한국에 테라스가 없는 건 이유가 있던 것이다.


비록 외창이 뚫린 테라스는 아니지만, 베란다로도 충분히 그 욕구는 채우고 있다. 밖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커피 한 잔 마시며 멍 때리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다. 최근에는 태닝을 시도하기도 했다. 창으로 자외선이 차단돼서 그런지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


책을 읽기도, 햇살을 만끽히기도 한다. (다 벗은 거 아님…)


요즘은 아내가 테라스에 곧잘 앉아 있는다. 만삭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숲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를 보고 있으면 나까지 아늑한 기분이 든다. 안이긴 하지만 바깥이기도 한 중간의 공간에서, 생명이긴 하지만 아직 사회인은 아닌 중간의 아이가 존재한다는 우연에서 묘한 운명감을 느낀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 역시 남편이기도 하지만 아빠이기도 한 중간의 존재가 될 것이다.


중간의 삶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는 금세 문제가 생긴다. 그 현장을 얼마나 많이도 봐왔던가. 가장의 책임과 회사원 노릇에서 균형을 놓친 아버지들, 국민의 대표로서의 의무와 권력의 한 축으로서의 욕망에서 균형을 잃은 대통령들, 후회만 남아버린 과거와 마땅히 고려되어야할 미래 사이에서 균형이 깨진 우리네의 오늘. 중간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균형은 깨진다.


우리집 중간의 공간


중간의 삶이 어렵고 힘든 것만은 아니다. 중간에서는 정답이 없으니 여유가 있다. 이렇게 해도 맞고, 저렇게 해도 맞다. 황희 정승이 두 하인 사이에서 “네 말이 맞다. 그리고 네 말도 맞다.”라고 한 것은 단순한 회피나 처세가 아니라, 중간의 삶을 받아들인 사람의 여유가 드러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양 쪽의 말이 다 맞으니 중간에서는 그것을 양쪽에 잘 전달할 뿐이다.


그래서 중간의 삶은 유연하다. 언제든 무게추를 옮길 수 있으니 기민하다. 균형이 잡힌 하루는 충만하고, 내뿜는 아우라는 주변을 압도한다. 그것을 테라스(혹은 베란다)에서 느낀다고 하면 조금 과한 해석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중간의 공간이 주는 편안함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요즘 전세계 사람들이 양극화되며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는 뉴스를 심심치않게 본다. 어쩌면 모든 현대인들에게 중간의 공간이 필요한 건 아닌지 생각한다. 스마트폰은 잠시 내려두고 테라스의 안락한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밖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깥 공기와 커피 한 모금을 섞어 마시며 여유를 내뿜는 것이다. 그 여유로 살아가는 삶이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게 아닐까? 그라니 나는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전 국민에게 테라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