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 차가 통행할 수 없는 둘레길에 119 구급차가 들이닥쳤다. 어두운 둘레길은 경광등의 빨간 불빛으로 물들었고, 거기에 서 있는 모든 얼굴들은 검붉어졌다. 구급대원, 행인들, 나까지. 그리고 누구보다 검붉었던 것은 피 묻은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밤 10시 쯤이었다. 가볍게 몸을 풀 요량이었기에 휴대폰도, 이어폰도 없이 둘레길을 달렸다. 어두운 밤길이었기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그저 풀벌레 소리와 내 발자국과 호흡 소리 뿐이었다. 착착착착착, 훕훕훕훕훕.
대략 70% 정도 달렸을 때 어두운 길 바닥 위에 제법 큰 물체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건이라고 하기엔 컸고, 사람이라고 하기엔 작은 알 수 없는 물체. 내 보폭은 일정했고 그 물체를 지나칠 때까지도 템포는 그대로였다. 내가 곁눈질로 그 물체, 아니, 주저앉은 할머니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할머니는 그자리에 꼼짝않고 앉아있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채로.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나는 곧바로 방향을 바꿔 할머니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얼굴을 낮춰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나 죽어..."
아차, 사고다! 그제야 길바닥에 검은 물감처럼 바닥에 뿌려진 피가 보였다.
"119, 119!"
바지춤을 만져봤지만 휴대폰을 들고 오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곧장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무나 한 명만 지나가라! 멀지 않은 곳에 밤 산책을 하던 아주머니를 발견했다. 전후 사정을 설명할 시간이 없어 다짜고짜 말했다.
"저 죄송한데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한 밤의 산책을 즐기던 누군가에게 땀 범벅이 된 신원미상의 남자가 헉헉 거리며 달려와 전화를 쓰자고 할 때, "아, 네~ 한 통 쓰세요."라며 휴대폰을 건네 줄 확률은? 0%였다. 당황한 아주머니는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휴대폰 없다며 손사레를 쳤다.
아차차, 실수다! 나는 상황을 설명했고, 아주머니는 되려 미안하다며 휴대폰을 내주셨다. 다행히 빠르게 신고는 이루어졌고 할머니는 구급대원의 살핌을 받으며 병원으로 옮겨졌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나온 할머니의 가족들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따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께서는 구급차에 동행하셨고, 그 뒤에 서있던 할머니의 사위와 손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같은 동에 살던 주민이셨다. 큰 일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아닙니다, 그래도 의식이 있으셔서 다행이예요, 같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밤에 할머니 혼자서 산책을 하셨나보다. 연세도 많아 보였고 지팡이도 짚으셔서 몸이 그 편치 않으신 분이었는데 어떻게 혼자서 나오셨는지 모르겠다. 거기서 얼마나 혼자 앉아계셨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내가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혼자서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싶다. 말하는 와중에 불현듯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뱉은 문장들은 '혼자'라는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혼자라는 단어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혼. 자. 내가 아는 단어였는지 헷갈렸다. 마치 처음 보는 단어같았다. 그게 이상했다. 분명히 아는 단어인데, 나는 몰랐다. 그 쓸쓸함을, 그 두려움을, 그 사무침을 몰랐다. 내가 그동안 혼자였던 적이 있었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함께였고,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회사에서는 동료들과 대화하고, 집에서는 아내와 함께 있다. 나는 혼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사무치게 놀랐다. 그리고 무서웠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막연함이었다. 언젠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아내와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를 보내고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연세가 더 들면, 그래서 거동이 불편해지면 어머니는 어떤 두려움을 안고 사실까. 아니, 지금 당장 무슨 사고라도 어쩌지. 불현듯 낙상 사고를 감지해 친족에게 알려주는 스마트 워치의 기능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스마트 워치를 주문했다. 고작 그것이 서울에 사는 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느 날, 할머니의 따님이 우리집으로 찾아오셨다. 너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손에는 과일 한 보따리가 들려있었다. 아뇨, 이런 건 안주셔도 돼요. 아유, 잘 먹겠습니다. 얼른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그 정도니 정말 다행이네요. 같은 짧은 대화를 나눴다.
할머니는 몇 주가 지나서야 다시 밤길에 혼자 등장하셨다. 커다란 반창고가 여전히 얼굴 한 쪽을 가리고 있었고, 부은 얼굴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또 나오셨다. 그 밤의 공포를 다시 떠올리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 인사를 건네진 않았다. 대신 할머니의 걸음걸이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지팡이에 의지한 걸음은 위태로웠지만 균형을 잃지는 않았다. 늘 걷던 걸음 그대로 걸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혼자의 무게는 이렇게 견디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