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살림에서 가장 신경쓰는 영역이 있다면 단연 냉장고다. 숨바꼭질 하는 것도 아니고 냉장고 깊은 곳에 숨어서 한달이고 두달이고 박혀있는 식재료가 있는 것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술래가 된 나는 냉동실, 냉장실, 윗칸, 아랫칸 할 것 없이 수시로 들쑤시고 꺼내서 기어이 먹어버리고 만다. 신입 식재료가 들어오면 라벨 프린터로 이름을 적어서 칸마다 붙여 둔다. 깊은 쪽에 숨어있는다고 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찬가지로 매일 하는 또 하나의 작업은 녀석들의 살생부를 적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주방 아일랜드 테이블에 몸을 기대어 포스트잇 한 장에 메뉴를 적는다. 아침 - 빵, 에그스크램블, 햄, 사과. 점심 - 두부면 들기름 막국수, 백김치. 저녁 - 목살김치찌개, 김부각, 건새우볶음. 내일 이 녀석들은 냉장고에서 퇴장 조치되고 아내와 나의 위장으로 내려갈 것이다.
며칠 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식재료가 있었는데 깻잎이었다. 쌈용으로 깻잎을 사두었는데, 어머니가 놀러오시는 길에 또 사오시는 바람에 깻잎이 쌓였다. 쌈으로는 원활히 소진되지 못하고 냉장고 한 구석에서 계속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깻잎이 혹여라도 금세 시들어버릴까봐 진공 락앤락에 담아두었더랬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그 봉인을 풀었다.
양파, 당근, 파, 마늘을 채치고 다져서 섞고, 거기에 간장, 액젓, 매실액, 고춧가루를 섞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잘 씻은 깻잎 사이사이에 고루 끼얹어 주었다. 깻잎김치가 뚝딱 완성됐다. 내일이면 간이 잘 배어서 쌀밥에 감싸 먹으면 짭조롬한 것이 꽤 먹을만 할 것이다.
다음 타자는 냉동실에 얼려둔 순대다. 그렇지 않아도 양배추 1/4 덩이가 남아서 야채칸에서 꽤 오래 숨어있었는데 잘됐다. 어제 새로 산 파도 송송 썰어서 양념에 볶아 먹으면 또 맛있는 한끼가 될 것이다. 막걸리 한 잔에 안주로 먹어도 좋고, 밥반찬으로 먹어도 좋고, 간식으로 먹어도 좋으니 일단 만들기만 하면 아내의 호평을 듣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든다. 재료에 뭐가 빠진 것 같은데... 아! 깻잎이다. 이를 어쩌나. 깻잎은 죄다 김치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깻잎을 또 사야할 것 같다. 냉장고 관리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회사 후배들이 왔을 때 만두전골을 해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