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경험의 설렘
2020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연말에 급물살을 타며 나의 첫 유럽 여행이 확정되자 마음이 바빠졌다. 시간이 없었다. 퇴사는 했지만 노는 것은 아니었다. 형편상 무직인 기간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있었기에 어차피 갈 수 있는 기간은 매우 한정되다 못해 정해졌다고 봐야 했다. 일단 유럽 어디를 갈지부터 정해야 했다. 마음도 급하고 겁도 나서 각종 사이트에서 패키지여행을 검색했다. 그러다 ‘이게 최선일까’를 비롯한 여러 의문이 들었고 페친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결과, 방식은 ‘자유 여행’, 목적지는 ‘오직 파리’로 정해졌다. 유럽에 가는 게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더더욱 한 도시만 가고 싶게 만들었다. 시간에 쫓겨 널뛰며 훑듯이, 여행 책자에 나온 것들을 확인하러 다니는 것 같은 여행은 내겐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짧게라도 여행이 아니라 생활을 하고 싶었다. 일상을 벗어난 곳에서
1월 14일에 떠나서 구정 전날 들어올게.
제 손으로 항공권을 처음 사봤어요
여행에 대한 로망은 늘 있었기 때문에 종종 새로운 여행 앱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면 깔아 두곤 했다. ‘Skyscanner’와 ‘마이리얼트립’ 양쪽을 오가며 파리 왕복 항공권 가격을 비교했는데 불과 2주를 채 남기지 않는 시점이라 그런지 시간 단위로 잔여 좌석이 줄고 가격이 오르는 것 같았다. 본래 8박 9일 정도를 생각했으나 구정 연휴를 앞둔 시기라서 인지 연휴를 하루만 더 끼워도 항공권 가격이 확 떨어졌다.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구정 전날 들어오겠다고. 보통 구정 전날은 본가에 갔던 터라 아내는 마음이 좀 불편했지만 받아주었다. 본가에는 내가 잘 이야기하기로 하고.
며칠 후,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체크인, 체크아웃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 비행 스케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내가 인지하고 있던 일정의 시작과 끝은 현지 기준이었다. (출발하기도 전부터 현지인 모드여야 한다는 건가ㅜㅜ)
9박 10일인 줄 알았던 일정은 출발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 전날 저녁에 공항에 가야 하는 것까지 감안하면 11박 12일짜리 일정이었다. 연휴 첫날 들어와 구정 차례 지내는 것에 차질 없도록 하겠다는 계획은 산산조각 났다. 아내에게 소식을 전하면서 이번 명절에는 좀 변화를 줘보자고 했다. 순서를 바꾸어 친정에 먼저 갔다가 구정 당일 오후에 나와 함께 시댁에 가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움직여야 하니 힘이 들 텐데 시댁에 있을 때 내가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니... 괜찮은 제안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신아, 너무 길게 가게 돼서 미안해.
에어비앤비 예약을 통해 배운 역지사지
항공권을 샀으니 이제 숙소만 잡으면 여행 준비의 반은 완성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음 날, 파리 여행 고수인 지인께 물었다. 숙소는 어디가 좋겠는지. 몇 개의 아파트 예약 URL을 받았고 시내 중심과 최대한 가까운 곳을 잡을 것, 바스티유 인근이 나을 것이라는 조언을 얻었다(이때는 바스티유가 뭔지도 몰랐다). 형편상 시내 중심의 아파트나 호텔은 잡을 수 없었기에 ‘바스티유’만 되뇌며 에어비앤비를 뒤지기 시작했다. 막연한 겁이 많은 편이라 검색 필터에 ‘슈퍼 호스트’를 체크하고(슈퍼 호스트란 것도 페친 통해 알았다) 그 안에서 추려야 했다. 막상 보다 보니 시내 중심과의 거리와 예산 중심으로 바스티유 외 다른 곳도 따져보게 되었다. 숙소 예약을 너무 닥쳐서 진행하게 되면 선택지가 현저히 줄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몸소 익혔다. 하지만 끝내, 바스티유의 괜찮은 숙소를 찾아냈고 예약 신청을 하였다. 바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호스트의 승인을 얻어야 비로소 결제가 가능하고 예약이 완료되는 구조더라. 출국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초조하게 답변을 기다리는데 시차 때문인지 다음 날에서야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읽으실 필요는 없다.)
간단히 말해,
1. 내 정보가 부족해서 승인할 수 없다
2. 정보를 달라
3. 예약 기간 만료 전까지
였다.
깨달았다. 당연하지 않나. 내가 호스트를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던 만큼 호스트도 나를 꼼꼼히 살펴볼 수밖에 없겠지. 낯선 이를 집에 들이는 것이니. 내 목적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상대의 입장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의 공감능력이란 자신의 욕망이 강하게 발휘될 때마다 언제든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스스로를 늘 경계해야 함을 배웠다.
나는 부랴부랴 프로필을 업데이트하고 아래와 같이 메시지를 보냈다.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함과 역지사지의 깨달음이 뒤섞이다 보니... 자기소개서 수준의 메시지가 되어버린...하하. (역시 읽으실 필요는 없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예약이 승인될 거라는. 하지만 메시지가 확인되지 못한 채 예약 기간이 만료되어버렸고 다시 예약을 하려고 보니, 불가능했다.
씁쓸함을 뒤로하고 2순위로 고려했던 곳들을 둘러본 후, 과감히 몽마르트르에 있는 방을 선택했다(왜 과감히인지는 나중 회차에...). 다행히 바로 호스트와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결제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돼 숙소 잡기를 완료할 수 있었다. 휴~
그런데 그로부터 30분 쯤 후, 그녀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그녀의 메시지는 내가 그녀의 방을 첫 번째로 꼽았던 것이 옮았음을 증명해주었다. 그녀는 매우 좋은 사람이고 숙소는 매우 좋은 환경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Laurent의 집에 묵기로 한 상태였기에 정중하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언젠가 다시 여행을 하게 된다면 당신의 방에 가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Laurent의 방에 누워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이 방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지만 둘이 쓰기에는 그녀의 방이 더 적합하니 아내와 함께 갈 때는 정말로 그 방에 가고 싶다.)
아무튼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항공권+숙박 준비를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이 나를 대단히 고양시켰다. 젊어진 기분도 들었다. 첫 배낭여행을 떠나는 20대가 된 듯한 느낌이 이런 거 아닐까 하는.
다음으로 한 일은,
이 날은 내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