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페친님들
1월 3일에 숙소를 확정하였고 1월 13일 저녁에 인천 공항 2 터미널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으니 내게 주어졌던 준비 시간은 딱 10일뿐이었다.
13일에는 오전부터 저녁까지 미팅 세 건이 있어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터미널 근처 레스토랑에 갔다가 여의도 편집실에 갔고, 미팅과 미팅 사이에는 환전 신청한 돈을 찾으러 처음 가보는 은행 지점에 가기까지 했다.
게다가 구매한 유심의 수령일을 잘못 입력했다는 것을 당일 아침 알게 돼 부랴부랴 반품하고 당일 수령 가능한 유심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씨름을 하느라 진땀이 났다.
13일이 되기 전까지도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챙기면서 2월 이사를 위해 처리해야 할 것들이 있어 도저히 일차별 여행 계획이란 걸 짤 틈이 없었다.
추천하고 싶은 곳, 확인하고 싶은 곳
일차별 일정은 비행기 안에서, 그도 안 되면 도착해서 짠다고 하더라도 꿸 구슬은 필요했다. 어떤 구슬이 있는지도 잘 모르니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원기옥을 만들기 위해 세상의 생명체들로부터 에너지를 모을 때의 느낌으로 두 팔,
아니고 두 엄지를 펼쳐 자판을 두드렸다.
내가 인기 페북 유저는 아니었기 때문에 위의 숫자 정도면 나로서는 뜨거운 반응이었다. 파리에 다녀와 본 이들이 주로 답해주었다 저마다 이곳저곳을 추천해주었고 나는 하나하나 구글 지도에 저장했다. ‘2020 파리 여행’이라는 카테고리도 만들었다. 그러다 여행 경험이 풍부하신 지인으로부터 사십여 군데의 파리 명소 리스트를 받았다(그 지인은 바로 나에게 10일 정도면 파리만 여행하라고 조언해준 분이다). 리스트를 받고는 한 도시에 10일 씩이나 가는 것이니 전부 다 가보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여행 막바지 중인 지금은 안다.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어쨌거나 그리하여 ‘항공권+숙박+가볼 곳’까지가 준비된 셈이다.
나만의 테마 여행을 만들어본다면...
두둑하게 가진 구슬을 현지에서 꿴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꿸지 마음이 동하는 나만의 테마를 삼을만한 기준 또는 영감을 무언가로부터 얻고 싶었다. 그렇다면 역시 내게는 영화였다. 나를 아는 페친들은 내 코드를 알았고 파리 관련 영화들도 리스트업 되었다.
<사랑해, 파리>, <미드나잇 인 파리>, <아멜리에>,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비포선셋>, <퐁네프의 연인들>.
이 중 기존에 본 작품들도 있었고 보지 못한 작품들도 있었는데 틈틈이 본다고 하더라도 몇 편이나 보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푸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작품이 중요했다. 그걸로 끝일 수 있으니.
고심 끝에 내가 선택한 영화는 이것이었다. (이 영상 꼭 끝까지 봐주시길. 음악도 이미지도 너무나 아름답다. 대신 보시고 나서 들끓는 파리 여행 욕망을 주체 못 하시더라도 책임 안 집니다)
나는 왓챠에서 <미드나잇 인 파리>를 찾아 5분을 채 보기도 전, 파리행 결정이 옳았다는 것에 내 돈 모두와 손모가지를... 응?!
아무튼 파리에 매료되었다. 고작 그 정도로. 그만큼 나는 파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파리가 어떤 예술가들과 관련이 있는지, 파리가 어떤 모양새와 문화를 갖추고 있는지, 파리의 역사가 어떠했는지 몰랐으므로 오직 <미드나잇 인 파리>를 통해 접한 내용으로 파리를 느끼고 이해하였다.
물론 이제, 현지에서 느끼는 것은 사진으로,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알고 있다 ㄷㄷ
암스테르담을 거쳐 파리로
얘들아, 커서 뭐 되고 싶어.
관련된 선물 사 올게.
엄마 바라기인 아이들이지만 아빠는 엄마와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아직까지는 아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다. 8살, 5살인 아이들은 열 밤 자고 온다는 아빠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18일에 댄스 학원 공연이 있었던 딸은 아빠가 처음으로 자신의 공연을 보러 오지 못 한다는 사실에 서운해했다. 하지만 선물로 화제를 돌리자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난 발레리나나 댄서가 될 거야.”
“난 경찰 아저씨가 될 거야.”
13일 아침,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기 전의 풍경이다. 나는 미션을 하달받았고 아이들은 귀국하는 아빠에게 받을 선물이라는 목표가 생겼다. 그럼으로써 아빠의 여행은 감수할만한 것이 되었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14일 00:55분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암스테르담. 비록 두 시간이지만 네덜란드도 가 본 사람이 되었다는데 신이 났다. 동시에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미션 수행에 촉각을 세우고 상점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 물건은 살만한 게 없었고, 아내와 여름에 같이 입을만한 티셔츠 두 장을 샀다. 암스테르담의 상징 문양이 멋지게 프린팅 된.
곧 비행기에 올랐고,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파리 상공을 날고 있었다.
내가 유럽 땅을 밟다니. 한 달 전만 해도 10년 내에 일어나기 힘든 일로 생각했던 일이 어느 순간 이루어져 버린 것이다.
유럽도 파리도 잘 모른 채, 혼자 여행해 본 경험이 없어 막연한 두려움과 설렘으로 가득한 채 내 나라 한국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다른 시공간에 와버린 것이다. 잘 해낼 수 있을까? 값진 시간으로 만들어 돌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나의 첫 파리 여행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