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르에 자리를 잡다
2020년 1월 14일. 아침 일찍 샤를 드 골 공항에 떨어져, 조금 헤매다 일주일간 파리 전역의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NAVIGO PASS를 샀다. 이제 믿을 것은 내 두 다리와 NAVIGO. 준비해 간 여권 사진을 판매원에게 내밀자 그녀가 가위로 사진 모서리를 조금씩 잘라낸 후 내 전용 PASS를 만들어주었다. 파리에 오자마자 파리지앵으로서의 내 것이 생기니 기분이 좋았다.
지하철을 타고 파리 북역(Gare du nord)에 도착한 다음, 버스를 타고 싶었으나 교통 노조 파업 때문에 뭔가 여의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글 지도를 보니 숙소까지 약 20분. 캐리어을 끌고 과감히 걸어갔다.
드디어 파리에 내 집을 마련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추웠고 숙소 찾는데 조금 헤매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해졌는데 마침내 찾아낸 숙소 바로 옆에 조커 계단 같은 풍경이 있어 즐거워졌다.(찍어줄 사람 있으면 호랑나비 춤출 텐데...)
숙소 호스트인 Laurent는 일을 하는 중이라 그의 친구 Robin이 나를 맞아주었다. 우리는 whatsApp을 이용해 연락을 나누었다. Robin은 좁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며 나를 아파트 2층의 한 집으로 안내했다. 작은 아파트였고 생전 처음 보는 구조였는데 있을 것은 다 있는 아늑한 분위기의 집이었다. Robin은 내가 머무를 방을 안내해주었고 주방 이용하는 법, 욕실과 세탁기 이용하는 법, 보안 장치를 켜고 집안을 드나드는 법을 간단히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슬리퍼를 살 곳이 근처에 있는지 물었다. 그는 자신이 가게로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홀로 파리 북역에서 숙소까지 올 때는 날씨도 꾸물하고 인적이 드문 느낌이라 조금은 각박한 느낌을 가졌는데 그의 뒤를 따르자 전혀 다른 느낌의 파리가 펼쳐졌다. 살아 있는 파리, 따스한 파리가 다가왔다. 각종 상점, 식당, 마트, 빵집 등이 즐비한 거리를 걸었다.
Robin과 함께 가게 세 곳 정도를 뒤진 끝에 슬리퍼 파는 가게를 찾았다.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른 데에 가보자고 하기가 좀 그래서 그냥 샀다. 6유로 정도를 줬던 것 같은데 파리에서 처음 산 물건이었다. Robin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올라오다가 파리에서의 첫 끼니를 먹었다. 아시안 푸드 가게였는데 필요 이상으로 짭쪼름하지만 입맛에 맞았다.
몽마르트르에 왔으면 언덕을 올라야지.
긴 비행의 피로를 씻어내기 위해 샤워부터 하고 계획대로 미리 티켓팅한 파리 빅버스 탑승으로 첫 일정 시작에 나서려다가, 날이 추운데 파리 북역까지 다시 걸어가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어느새 오후 3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가고 있어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은 그냥 동네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선 어차피 가보려고 했던 샤크레쾨르 성당이 가까이에 있어 거기 올랐다가 발길 닫는 대로 걷기로 했다.
몽마르트르 언덕 위로 바람이 정말 심했고 옷 하나를 더 껴입고 나왔음에도 추웠다. 칼바람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고 뭉친 바람에는 몸을 떠밀릴 정도였다. 너무 춥다는 생각에 기온을 봤는데 영상 10도가 넘었다. 같은 옷차림으로 서울에서는 영하의 날씨도 그럭저럭 견뎠는데... 바람의 위력을 새삼 깨달았다. 불면 불수록 나그네가 옷을 여기는 바람에 내기에서 지는 바람 아저씨도 생각났고.
궂은 날씨에도 성당 근처에는 사람이 많았다. 유명 관광지의 위력을 실감했다. 온갖 인종이 모여 있었고 특히 카메라를 든 채 위치를 잡아주고 포즈를 요구하는 낯익은 목소리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처음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별 감흥이 없다가 전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 때문인지, 곳곳에서 성스럽게 불타는 촛불들 때문인지 곧 몸이 녹았고 갖가지 장식물들과 모자이크들, 스태인드 글라스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리 역사도 천주교 역사도 성경도 별로 아는 것이 없어 한 바퀴 휘 둘러보고는 의자에 앉아 엄청난 크기의 그리스도 벽화를 보며 다운로드하여두었던 여행책 샤크레쾨르 성당 편을 읽었다. 두 페이지 남짓한 내용이라 정서적으로 와 닿는 것은 없었다. 성당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 주인데 역사의 전후 맥락과 등장인물의 전사를 모르니 그냥 글자를 읽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한참이나 봤다. 누군가는 연인과 즐거웠고 누군가는 가족과 따뜻했고 나처럼 혼자 온 이들은 대체로 경이감에 취하거나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간절함을 풍겼다. 나는 그냥 계속 보기만 했다.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지켜봤다. 이제 첫날일 뿐이니까.
너무나 예쁜 동네, 걷는 곳곳 모두가
밖으로 나가서는 몽마르트르를 다 뒤지겠다는 심산으로 이곳저곳을 걸었다. 아파트들은 적당한 높이에 클래식한 느낌을 갖고 옹기종기 모여 있어 어딜 봐도 다 예뻤다.
버티컬 한 사진을 찍기가 좋아 비슷비슷한 곳에서도 여러 번 셔터를 눌렀다.
한창 걷다 공동묘지 같은 곳도 가고(이 즈음 유심이 먹통이 되는 바람에 GPS만을 활용해 지도 상 위치 파악 정도만 가능해지고...)
붉은 네온사인이 화려해 올려다보니 물랑루즈가 나오고...
배가 고파 quick이라는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버거를 먹었는데 평생 한 번의 추억으로 잘 소장하기로 했고, 해가 저물어가자 시차로 인한 피곤함도 몰려오고 처리할 일도 생각나 다시 오르막길과 여러 계단을 올라 숙소로 들어왔다. 동네가 너무 예뻐 힘들지는 않았다.
세수를 하고 유심 문제를 해결하고 프로듀싱 중인 작품 원고를 보다가 졸음이 쏟아져 잠깐 눈을 부쳤는데 방 바깥에서 소리가 나 whatsApp 을 보니 호스트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Laurent를 만났다. 그는 훤칠하고 건장한 호남형 남자였다. 그에게 세탁기 사용법, 주방 이용법 등 보다 자세한 안내를 받았고, 교통, 음식 등 주변 인프라에 대한 문서도 받고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발암유발 영어로 간신히 마치고 방에 다시 들어와 다 덮고 엎어져 잠을 잤다.
그리고는 새벽에 깨어났다. 2일 차에는 10시 전에 숙소에서 나서 빅버스를 타고 파리 시내를 둘러본 다음 뮤지엄 두 곳 정도를 들어가 보고 저녁 즈음 세느강 유람선 바토무슈를 타는 것으로 일정을 복기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