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흠뻑 취하다
드디어 파리 누비기 시~작!
어제 Laurent한테 배운 대로 세탁기를 돌리고 부랴부랴 준비해 10시쯤 집을 나섰다.(Laurent가 알려준 길 안내 맵-시티 매퍼-에 숙소 주소를 우리 집으로 지정했다. 시티 매퍼는 노선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파리 교통 파업 상황까지 반영이 된 정보를 알려주었다.)
집 근처 Le Grenier a Pain(파리 최고 바케트상 2회 수상이라고 Laurent가 알려줌)에 들러 짧은 바케트와 쓴 에스프레소를 사서 파리 북역까지 걸으며 먹었다. 과연 바케트가 부드럽고 담백하고 고소했다. 맛있었다.
이틀간 머릿속에 파리 지도를 그려준 빨간 버스
파리 북역으로 향하는 대로를 걷는 동안 파리에 도착해 처음 햇빛을 만났다. 세계 4위의 인구밀도도 체감했다. 걸음으로, 자전거로, 차로 다양한 인종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파리 북역 근처 빅버스 정류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다른 회사 2층 버스에 탔다가 내린 것은 안 비밀ㅋ)
드디어 버스를 타고 파리 시내를 누비기 시작했다. 햇볕이 무색하게 무지 추웠지만 2층에 앉았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듣고 빅버스 앱 지도를 보며 파리 중심부의 대략의 지리를 읽히면서 어떻게 도시 대부분이 이렇게 클래식함을 유지하고 현재 문명과 조화를 이뤄낼 수 있는지 내내 감탄했다.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극장도 보고,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도 보고, 점심때 즈음 루브르를 지나고 세느강변을 따라 오르세 미술관에 다다르자 여기부터보자 하고 내렸다. 본래 오르세 미술관과 맞은편 오리앙주 미술관을 함께 볼 수 있는 티켓을 사려다가 오르세와 로댕 미술관을 볼 수 있는 티켓을 샀다. 오리앙주는 잘 몰랐지만 로댕은 꼭 가보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터라. 오늘 하루는 여유롭게 두 미술관을 보고 저녁을 먹고 바토무슈를 타면 되겠거니 했는데...
조각에 압도되고 회화에 젖어들다
웬걸, 오르세 미술관 1층만 둘러보는데 넋이 나가 정신 차려 보니 세 시간이 흘러 있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음미하긴 했지만 딱히 전시 관람 취미가 없던 내가 완전히 미술에 빠졌던 것이다. 1층 중앙에 전시된 조각상들에 경이감을 느끼고 1층 외곽의 그림들을 살펴봤는데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그림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찾아내려 애쓰면서 몇 번이나 울컥함을 느꼈다. 평론가, 후원자, 대중... 그때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혹독함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경쟁은 마찬가지라 예술가들끼리 서로를 헐뜯고 그러면서도 지지를 보내는 친구, 동료, 공동체와 함께 할 수밖에 없구나, 그런 환경 속에서 새로운 예술 사조를 만들어내려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으려 했구나 하는 인간으로서의 동질감과 예술가에게 바치는 경외감 같은 것이 일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장 크게 놀란 대목은 미술 작품에 쏙 빠져든 나 자신이었다고 할 만큼 나는 다른 나를 발견 했다. 거액을 들여 파리에 왔으니, 잘은 모르지만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이 눈앞에 있으니, 왠지 부끄러운 한국인이 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서,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해서 등의 자잘한 동기가 있긴 했지만 그런 것들을 훌쩍 넘어서는 쏙 빠짐이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갑자기 내 취향이 고급(?)스러워졌다든가 들인 돈에 대한 책임감이 생겼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본이 내 감각을 연 것이고 누구라도 시간 자본만 확보되면 쉽게 취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구나.
나도 한국에서 살던 대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싫어서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문화권 안에 들어가 새로운 취향을 발견함으로써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은 즐거웠지만 여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쫓기면서 모임에 필요한 일련의 의무(?)들을 수행하는 동안 지쳐버리고 말았다. 게으른 나 자신을 탓했고 점점 무력해지고 불안해지고 불행해졌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다르다. 다시 오기 매우 어려울, 미취학 아동기, 수능 특차로 진학 결정되고 난 후 얼마간,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인생에서 세 번째로 시간 자본을 주머니에 꽉 채운 시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나와 관계된 이들과 일로부터 ‘8시간 전, 9000km’라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했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했다.)
나는 쿠르베 그림 앞에서 이번 여행을 통해 확실한 것 하나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한 번도 흥미를 가져보지 않았던 파리 예술사에 대한 주체 못 할 호기심과 그것을 통해 얻게 될 앞으로의 삶의 태도. 내 삶의 변곡점 위에 서 있음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것이 내가 이제 뭔가 고급문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거나 교양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시간 자본만 확보되면 누구나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으므로 사람들의 시간 자본을 늘려주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인가를 탐구해야 할 예술계 종사자로서의 의무를 가져야 마땅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예술가들과 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고 내 일을 예술의 의무라는 관점에서 좀 더 진지하게 다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렇지만 내가 이번에 느낀 예술이란 고급문화 같은 게 아니었다.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예술가들은 일반 대중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인이었고 작품을 통해 현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돈을 벌어야 했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했고 시기했고 질투했다. 예술은 삶을 담는 것이기에 너무나 소중한 것임이 확 와 닿았다. 거창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는 와중에 이룬 대단한 성취와 업적에는 어마어마한 재능과 노력이 필요했겠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결국 누가 더 자유로울 수 있었는가, 다시 말해 누가 더 시간 자본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는가이지 아닐까. 따위의 생각 속을 유영하며 오르세 안을 오후 내내 거닐었다.
비옷을 입고 비 내리는 파리를 걷다
결국 해 질 녘, 2층을 조금 더 보던 중 폐장이 다가오자 다음날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나왔다. 다행히 목요일은 늦은 시간까지 연다고 하니 로댕 미술관에 갔다가 오르세 미술관을 마무리할 생각으로. 그리고 바토뮤슈도 타고.
저녁에는 다시 빅버스를 타고 아직 돌지 못한 구간을 돌아보기로 했다. 콩 코드르 광장을 지나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을 끼고돌아 그랑 팔레와 쁘띠 팔레 사이를 지나서 에펠탑에 도착했다.
그 사이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빅버스 티켓팅 때 받은 비옷이 있었다. 그걸 걸치고 에펠탑 주변을 배회하다 배가 고파 일단 K-Mart로 향했다. 장을 좀 보러 가는 길에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있으면 들어갈 생각이었다. 오르세에서 시간 가는 줄 몰라 오전에 바게트를 먹은 후 내내 굶었으니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다. 또다시 빅버스를 타고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내려 K-Mart로 향하는 길, 초콜릿 가게도 들어가 보고 문구점도 들어가 보고 구경거리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그냥 장을 봐서 집에서 대충 때우기로 하여...
신라면, 햇반, 종갓집 김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다.
p.s. - 미술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 스펀지처럼 관람한 것 같은데 나는 쿠르베와 보나르가 좋더라. 보나르의 어떤 그림을 통해서는 프로듀싱 중인 작품의 표지 컨셉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