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는 (당연히) 체력이 필요하다
무척 힘든 하루였다. 삼일 만에 체력이 고갈된 것인지 시차 적응의 피로가 몰려오는 것인지 오후 서너 시쯤에는 허리가 아프고 졸음이 쏟아졌다.
오전 10시쯤 집을 나서 전날 먹었던 바케트 집을 찾았는데 쉬는 날인지 문이 닫혀 있었다. 다른 빵집을 찾아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파이 두 개를 사고 근처 마트에서 우유를 사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파리에 오고 나서 가장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날씨 앱을 켜서 보니 돌아갈 때까지 가장 날씨가 좋은 날인 것 같아서 야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차 목적지는 전날과 같이 파리 북역의 빅버스 정류장이었지만 두 번이나 걸어가 봤으니 지하철을 타보기로 했다. 애플파이였고 초콜릿 파이였던 두 파이를 우유와 함께 먹으면서 10분쯤 걸어 지하철에 올라 두 정거장을 가니 파리 북역이었다. 한국에 비해 호선마다 지하철 환경이 크게 달라 전날 정거장을 지나치기도 해 내릴 때 긴장했는데 무난히 도착.
빅버스 블루라인 버스에 올랐는데 오픈된 2층에 올라가 보니 의자에 전날 내린 빗물이... 청소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서비스의 정도라는 것은 국가마다 다를 수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가장 빗물이 덜 묻어있는 의자에 간신히 엉덩이 끝을 걸치고 앉았다.
오르세 미술관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두 정거장 후에 레드라인으로 갈아탔고 날씨 좋음을 만끽하며 버스 위에서 시테섬을 더욱 느끼려 애썼다. (지금 조금 후회하는 것이 시테섬 일정과 로댕-오르세 일정을 바꿨어야 했는데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ㅎ)
가장 한가로운 시간 속에서 <지옥문>을 열다
시테섬을 지나 세느강변을 따라 오르세 미술관에 도착해 곧바로 걸어서 10분 거리 정도 되는 로댕 미술관부터 갔다. 오르세는 목요일에는 9시 넘어 폐장한다는 것을 체크해두었고 볕이 좋을 때 로댕 미술관 정원을 거닐며 조각상들을 보고 싶었는데 그건 잘한 결정이었다. 로댕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셀카봉을 꺼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북한에서 온 유학생 느낌인 것 같았는데 마음에 들었다.
로댕 미술관은 한국어 가이드가 없어서 그냥 작품 자체로 느끼지 하고 둘러봤는데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음미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이런 조각이 가능한가, 한 대상에 이토록 몰입이 가능한가 하는 경이감을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당시 많은 인물 조각, 인물화의 모델을 서곤 했던 유명인들 혹은 보통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예술가의 요구에 따랐을까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로댕 미술관에서 가장 유심히 살펴본 작품은 그 유명한(나는 이번에 알았지만ㅎ) <지옥문>이었다. 다양한 요소들이 거대한 문을 이루고 있었는데 아비규환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살아 있었다. 상부에 생각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걸 지옥문 위에 올려둔 것은 인간의 삶과 고뇌가 결국 지옥문 앞에 선 것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일까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라면 동의할 수 있겠다 싶었다.
오르세 두 번 가본 사람
로댕 미술관에서 나와 오르세 미술관 2차 관람에 나섰다. 보안 검색을 통과하고 코트를 맡기고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고 짤막한 영어를 하면서 모든 것이 물 흐르는 듯 익숙하게 진행되자 기분이 좋았다. 한 번 와봤다고 내 안의 그 녀석이 신났구나 싶었다. 전날 미처 보지 못한 2층을 둘러보는데 금방 볼 줄 알았던 2층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 3, 4층을 건너 뛰고 가장 유명한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는 5층으로 갔다.
고흐, 고갱, 세잔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지면에서, 모니터에서만 보던 그림을 30cm 거리에서 보고 멀리서도 보고 하니 그림의 질감과 선 위치에 따른 미묘한 차이가 느껴져 음미하기에 좋았다. 문제는 이때부터 허리가 아파오고 즐거운 것과 별개로 졸음이 쏟아지기도 해, 전날 당 떨어진 것 같을 때 먹으려고 사두었던 초콜릿을 꺼내 먹어가며 중앙 벤치에 앉아 쉬엄쉬엄 감상했다. 새로운 그림을 얻기 위해 타지에 간 예술가들의 이야기에서 내가 여기 왜 왔는지를 잊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한강은 너무 커. 아름답기에 적당한 세느강
3, 4층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파리 여행 때 가보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빅버스 디럭스 티켓에 포함된 바토무슈 유람선을 타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탈까 하다가 서서히 노란빛에서 붉은 석양으로 바뀌어가는 하늘을 보니 걷고 싶어 졌다. 걷는 게 허리 아픈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고.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에펠탑까지 세느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해가 저무는 모습을 눈에 다 담았다.
취하고 싶어서 <미드나잇 인 파리>, <비포선셋> OST를 들으며 걷고 또 걸었다. 한껏 취해지진 않았고 가족들 생각을 했다.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함께 이곳을 거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리 여행 가이드가 될 생각에 신났다.(고작 3일 머무른 주제에ㅋ)
에펠탑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여섯 시 정각, 유람선이 시테섬 쪽으로 출발했다. 그곳을 반환점으로 삼아 돌아오는 한 시간 코스. 유람선 위에서 찬 강바람을 맞으며 환상적으로 빛나는 세느강변의 명소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이때는 외로웠다. 진하게 키스를 나누는 남녀, 친구들과 깔깔대는 모습들, 가족들이 함께 와서 아이들을 챙기는 모습들... 나처럼 혼자 온 이들이 종종 눈에 띄었는데, 추위와 고독과 싸우는 감정만 느껴졌다. 나도 그랬고. 다음에 파리에 올 때는 따뜻할 때 오리라.
바토무슈에서 내려 어디 가서 무엇을 먹을지 잠시 고민하다 무척 피곤했기 때문에 집 가까이로 가서 맛있는 걸 먹자고 생각을 정리하고 시티매퍼앱에 Laurent가 알려준 타이 음식점 주소를 찍었다. 다시 세느강변을 따라 지하철역에 갔는데 난생처음 2층 지하철을 보았다. 그 순간 뭔가 느낌이 싸한 것이 그걸 타면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될 것 같아 플랫폼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역시 내가 타야 할 호선이 아니었고 갈아타는 곳 안내 화살표에 따라 내가 탈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뭔 놈의 갈아타는 길이 밖으로 다시 나와서 세느강 다리를 건너 한참을 걸어 다시 역으로 들어가는... 그 정도면 다른 역이어야 하는 거 아닌 거 싶은ㅎ 아무튼 그렇게 무사히 지옥철(파리에도 지옥철이라는 말이 어울리더라. 차창에 거의 얼굴이 붙을 듯이 밀어붙여져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어느 백인의 얼굴을 본 순간이 완벽하다 믿었던 파리의 우아함에 균열이 가는 첫 순간이었다.)을 타고 식당에 도착했다.
나를 맞이라는 타이 사람에게 헬로우라고 해야 할까 봉쥬르라고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고 헬로우라고 하고 자리를 안내받아 메뉴판을 보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찰나, 팟타이라는 글자를 발견하였고 정체를 알 수 없으나 쉬림프가 들어간 무엇이 있어 주문하였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곧장 쓰러져 잠에 들었다.
덧.
로댕 미술관에서 사진을 찍으며 저 너머 황금으로 된 아름다운 지붕은 어디인지 궁금했다. 마지막 날 알았다. 앵발리드의 성당 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