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다했다
어릴 때 TV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를 좋아했다. 나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방영 당시, 국민학생 시절, 수도 없이 따라부르고 흥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장미로 태어난 오스칼
정열과 화려함 속에서 살다 갈 거야
장미 장미는 화사하게 피고
장미 장미는 순결하게 지네~
성인이 되어서도 뜬금없이 흥얼거리기도 했다. 정말 뜬금없이. 무언가 내 장기기억 저장소에 어떤 형태로든 저장된 것이 분명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주인공 오스칼을 좋아했다. 금발의 남장여자 캐릭터인 그녀는 (당시에는 남장여자라는 설정을 크게 의식하면서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늠름한 군인이었고, 슬픔을 가진 사람이었고 정의로웠다. 그리고 흑발의 앙드레 또한 좋아했다. 오스칼을 향한 마음과는 달랐다. 오스칼에 매료됐다면 앙드레에게는 정이 갔다. 연민의 감정이었던 것 같다. 그와 오스칼이 맺어지길 바랬던 것 같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서는 단두대로 끌려가기 전 공포에 질린 얼굴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베르사유의 장미>에 대해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이다. 그러고보면 희한하다. 어떻게 프랑스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다룬 작품을 그렇게 좋아하고도 프랑스 역사에 대한 관심은 갖지 않았던 걸까. 너무 어렸을 때라 정말 콘텐츠로서만 소비해버렸던 것인가. 하지만 어쩌면 <베르사유의 장미>가 날 파리로 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난생 처음 2층 열차를 타고 베르사유로
여행 중 가장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8시 조금 안 된 시간이었는데 파리의 겨울밤은 정말 긴 것 같다. 어릴 적 새벽에 집을 나서 독서실에 가던 길이 생각났다. 베르사유 궁전의 개장 시간은 10시인데, 관람객이 많으면 1시간 이상 줄을 서야한다고 들었기에 9시 반 전에 도착할 것을 목표로 지하철을 탔다.
몽마르트르로부터 베르사유는 지하철과 기차로 8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체감상으로는 그보다는 훨씬 짧게 걸린 것 같았다. 초행길이라 모든게 구경거리였겠지 시티매퍼앱에 의지한 채 전혀 헤매지 않았다.
기차 안은 붐비지 않았다. 나처럼, 누가봐도 베르사유 궁전에 가는 관광객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었다. 함께 일제히 내리면서 적절한 시간에 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역에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를 걸어갔다. 역에서 내린 사람 대부분이 한 방향으로 이동했기에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서서히 노란 아침 햇살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받은 베르사유궁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가까이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입구로 들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조금만 늑장을 부리면 한참을 줄을 서게 될까봐 걸음을 재촉했다.
동이 터오는 느낌을 담고 싶어 얼른 사진을 찍고 이미 쭉 늘어져 있는 입장 대열에 합류했다. 여행앱 KLOOK을 통해 구입한 바우처를 띄워놓고 조금씩 조금씩 입구로 향했다. 내 평생 통과해 본 보안 검색대 수보다 더 많은 수를 통과했음이 분명한 파리 여행.
역시나 보인 검색대를 통과하고 궁전 안쪽을 가로질러 다시 궁전으로 들어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받고 관람을 시작했다. 여기서는 오디오 가이드가 무료였다. 역시 태양왕 루이 14세가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은 궁전다운 아량이랄까.
화려하고 화려하고 또 화려한
태양왕이라는 불리는 이의 궁전답게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태양계 행성의 이름이 방마다 붙어 있고 회화, 조각, 가구, 소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그야말로 금을 처바른 방들이 즐비해 있었다.
몇 개의 방을 지나자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이 등장했다. 당시에는 유리와 거울이 무척 비쌌는데 왕가의 힘을 압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설계된 방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방들을 지나고(개인적으로는 화려함에 대한 별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할 수 있을만큼의 권력과 폭력의 산물이겠지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면서 지나가고 또 지나쳐서)
어서 궁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점심 때 즈음이 되자 궁전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아닌지 걱정되었다. 창밖으로 이미 정원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래서 서둘러 한 바퀴를 돌아보고는 안내원에게 가든에도 오디오 가이드 콘텐츠가 있냐고 물었다. 없다기에 기기를 반납하고 정원으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가 다시 계단을 통해 궁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베르사유의 정원은 하늘마저 품었네
찬 겨울 공기가 들숨으로 들어와 몸을 깨웠다. 따사로운 햇살은 추위를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푸르디 푸른 하늘은 온 정원을 다 걷고 싶게 만들었다.
(마무리 지어 다른 일차 여행기 정리하고 순서대로, 제대로 올리겠다는 다짐은 지켜지지 못한 채 4년 가까이 지나 이제야 업로드... 언젠가 파리에 다시 가 여행기를 완성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