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전, 출근길 여행자의 추억
출근길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는 출근길을 즐기며 걷는 천연기념물 노동자다. 아, 오해는 말아 달라.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일할 생각에 즐거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는 부류는 아니다. 내게 출근길은 노동으로의 ‘출근’이 아닌 ‘길’을 걷는 산책의 시간이다. 출근시간이 10시라는 점은 생각보다 많은 이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매일 아침 퀭한 눈으로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무리들을 피해 여유로운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장점이다.
거리는 그 공간을 메우는 빛과 사람들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띤다. 나는 매일 아침,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차가운 을지로입구 대로가 아닌, 명동성당이 고즈넉이 서 있는 언덕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넉넉한 여백이 있는 아침에 마주하는 붉은빛 건축물은 유럽의 오래된 성당 못지않게 경건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여기 남산 자락에 조용히, 그리고 단단히 서서 서울시민이 겪어낸 격동의 세월을 함께 지나왔다. 여백의 틈으로 그 시간의 결이 함께 전해진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침을 지저귀는 까치들 뿐이다. 쫓기듯 바쁜 을지로 직장인들이 진작에 출근하고, 아침잠 많은 관광객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정쩡한 아침 시간이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명동거리를 산책하는 여행자가 된다.
다른 동네에서는 무심코 지나치는 신선설렁탕 앞은 언제나 일본인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다. 이 집이 이렇게 핫한 맛집이었다니. 이삭토스트 앞에는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싶은 젊은 일본인들이 줄지어 서있다. 일본에서 이삭토스트 분점을 내보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외국여행 중 맛집을 찾아가면 종종 다른 한국사람들이 이미 잔뜩 줄 서 있을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줄지어 있는 대기자들 중 아직 차가운 아침 공기에 옷깃을 여미며, 잠이 덜 깬 얼굴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일본인 남자에게 괜스레 친근한 감정이 인다. 한 편으론 외국의 어느 맛집에 다른 한 무리의 한국인들과 줄지어 서 있을 때, 그 풍경을 보고 지나치던 현지인들의 생각에도 이제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스마트 폰과 그들 앞에 놓인 거리를 번갈아 들여다보며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는 관광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따라 나도 여행자인 척 발걸음을 늦추고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두리번거려본다. 오늘도 나는 익숙한 거리를 낯선 시선으로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
코로나 확산 전에 써 놓은 글인데, 불과 몇 개월 만에 우리의 일상은 판이한 모습이다. 나는 대중교통 이용을 중단하고 지하에서 지하로 자차를 이용해 출근하기 시작했고, 출근 길은 한산한 거리 대신 끼어들기 차량과 난폭운전이 즐비한 도로의 풍경으로 바뀌어 버렸다. 관광객은 사라지고 상점들의 문은 굳게 닫힌 명동의 풍경 역시 생경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새로운 현실들로 인해 익숙했던 일상은 어느새 과거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