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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의 귀환

by 힉엣눙크

토요일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일하러 나가면 아내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전화를 하지 않는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안 바빠? 통화해도 괜찮아?” 목소리의 색깔이 공식적이었다. 나는 조금 긴장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는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별 일 아닐 때와 별 일이 있을 때다. 별일 아닐 때는 평소의 목소리다. 톤이 담담하고 억양도 높지 않다. 하지만 별 일이 있을 때는 뉴스 첫 멘트를 시작하는 아나운서와 같이 한 키가 올라가고 공식 논평을 하는 청와대 대변인의 어조처럼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을 두는 신중한 톤으로 바뀐다. 그리고 놀라지 않게끔 본론은 뒤로 미룬다. 먼저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 예를 들어 “지금 퇴근해서 오면 안 돼?” 그렇다면 가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거다.

작년이었다.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내의 공식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퇴근해서.. 바로 오면 안 돼?” 왜라고 물어도 대답 대신 그냥 오라고 했다. 집에 이르자 아내는 내가 도착하기까지 50여 분간 뱀과 대치중이었다. 뱀이 다른 곳으로 숨어 들어가 버리지 못하도록 삽으로 퇴로를 막고서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통화 중 뱀 이야기를 미리 하지 않은 건 혹여 급히 오다 사고 날까 봐 그랬다 했다.

어제도 아내의 공식적인 목소리에 나는 조심스럽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제비 새끼 한 마리가 바닥에 떨어졌어.” 아내의 대답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고 어찌해야 좋을지 혼란스럽다는 마음이 전해졌다. 옆자리 직장 동료에게 떨어진 제비 새끼 얘기를 했더니 설화에 나오는 얘기 아니냐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향했다.


은달이가 물어 죽이지 못하도록 종이박스에 담아 그늘진 높은 곳에 놓아두었던 제비 새끼는 눈도 뜨지 않은 상태였다. 꼬물거리면서 아직 살아 있었다. 처마 바로 밑에 있는 제비집은 높이가 3미터를 넘는데 거기서 떨어진 제비가 살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새들은 뼈 가운데가 비어 있어 가벼운 데다 아직 새끼라서 중력의 힘이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은 듯했다.

우리 집에 제비집이 들어선 건 올해 5월이었다. 한 쌍의 제비가 은달이와 승부차기를 해서 이기고 우리 집에 입주했었다. 제비 부부는 집 지은 지 두어 달 만에 부화한 다섯 마리를 부지런히 먹여 키워서 모두 출가시켰더랬다. 빈 둥지를 바라보며 올해 입주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바닥에 떨어진 제비 똥을 청소하려 했는데 당황스럽게도 또 한 쌍의 새로운 제비가 그곳에 입주했다. 이번에는 네 마리를 낳았는데 그중 한 마리가 떨어진 것이다.


둥지에 다시 올려다 주려고 종이박스를 옮길 때 그 속에서 제비 새끼는 균형을 잡으려고 버둥거렸다. 생명의 신비는 바로 저 버둥거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 상 모든 버둥거리는 것들에게 경배를.

손바닥 안에서 새끼는 가만히 있었다. 사다리를 올라 제비둥지에 살며시 놓아두고 다시 내려왔다. 그 과정을 어미 제비는 인근 나뭇가지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다리를 내려온 내게 아내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쟤가 내년에 로또 1등 번호를 물어다 주면 좋겠다.”(사실 아내는 로또를 사본 적이 없다)


오늘 아침 제비둥지를 올려다보니 네 마리의 제비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떨어진 한 놈이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살아남은 건 분명했다. 네 마리 모두가 무사히 둥지를 떠나기를 빌었다.

미국 일리노이주 복권 당첨자에 관한 연구(Brickman, Coates & Janoff - Bulman, 1978)에서 복권 당첨 1년 뒤, 21명의 당첨자들과 주변 이웃의 행복감을 비교했더니 놀랍게도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미국의 복권 당첨금은 우리나라 로또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액이라는데 그 행복감이 불과 1년 남짓이었다니 허망하게 느껴진다. 또한 장기간의 다른 연구에서는 복권 1등 당첨자의 말로가 대부분 불행으로 마감되었다고 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물질은 필수적이기도 하지만 급작스런 행운이나 과욕은 곧잘 화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돈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은 인류의 문화가 불러온 재앙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바늘 하나를 하늘에서 떨어뜨렸을 때 지구 상 어느 호박에 꽂히는 확률이라고도 한다. 비유야 어찌 되었든 생명 탄생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일 것이다. 태어나기만 하면 만사형통 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얼마나 많은 난관과 고통, 얼마나 많은 인연, 도움,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가 우리를 기다리던가. 그리고 그 생명을 앗아갈 위험은 또 얼마나 많이 도사리고 있는지.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평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저 높은 빌딩 위에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균형 막대기 하나에 의지한 채 기나긴 외줄을 타는 곡예사와 다를 바 없다. 우리 몸 외부의 위험요소는 차치하고 몸 내부의 그 많은 위험은 또 어떠한가. 제비 새끼가 균형을 잡으려 버둥거리듯이 뭇 생명들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버둥거리고 있다. 생존이라는 외줄 위에서


내가 태어난 것이, 그런 우리가 살면서 이렇게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평범한 일상이 바로 로또와 비교할 수 없이 큰 기적임을 망상 속에 갇혀 잊고 지내던 나는 어제 생각지 못하게 떨어진 제비 새끼를 목도하고 여실히 또 깨닫게 되었다. 예수의 옆구리에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본 도마처럼.


금은보화를 예비한 박씨도 로또 1등 번호도 물고 올리 없는 제비들이지만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연의 고리와 생명의 숭고함을 다시 한번 내게 일깨워 주었다. 어쩌면 제비가 이미 내 마음에 소중한 것을 물어다 주었는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내가 크게 깨닫지 못했을 뿐.


수십 년 만에 맞는 극한 혹서의 계절, 제비 새끼가 던져준 작은 깨침 덕분에 당분간 지금의 더위도 그리 힘들게 여겨지지는 않을 듯싶다. 아내는 내년에 로또와 같은 행운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2018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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