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창원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말러 교향곡 9번을 들으러 성산아트홀에 다녀왔다. 1시간 20여 분이 넘는 긴 곡이었다. 1악장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서 연주회장으로 들어서려는데 초등학교 1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와 엄마가 손을 잡고 입구에서 다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가 울었다. 엄마에게 내어준 왼손을 당기며 오른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들어가기 싫었던 것이다. 엄마는 찌푸린 얼굴로 난감해하더니 이내 체념한 듯 “그래 집에 가자” 하며 아이를 돌려세웠다.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말러 음악을, 그것도 공연장 의자에 붙박인 듯 앉아서 소리 내지 않고 듣는다는 것은 고문일 수도 있을 터였다. 넓은 홀에 사람들이 가득 찼고 어둠이 내린 후 연주는 다시 시작되었다. 쉬운 곡이 아님에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말러의 힘은 무엇일까?
단감의 수확철이 10여 일 늦춰졌다고 한다. 올해 유난히 더웠던 날씨 탓이다. 요즘 우리 마을 주변 과수원들이 소란해졌다. 여기저기 감을 따는 사람들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창원은 단감 재배면적과 수확량에서 전국 1위이다. 이맘때면 밤에도 소란해진다. 한밤이나 이른 새벽에 정원을 거닐 때면 클라리넷과 오보에 소리 같은 울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주남저수지를 찾아온 기러기들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불청객도 찾아들었다.
“단감 하나를 훔쳐도 절도죄로 처벌됩니다.”
낯선 현수막들이 최근 도로변 여기저기에 나붙었다. 뉴스 기사를 보니 잘 익은 최상급 단감만 골라서 대량으로 훔쳐 가는 절도사례가 여럿 발생하여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사 들어온 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단감 절도와 관련해서 지역이 이렇게 소란해지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탄저병, 일소피해 등과 싸우며 고생스럽게 농사를 지었던 농민들에게는 가슴이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풍요의 계절 가을을 잘 나타내는 상투적인 표현이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수확철이 되면 북방의 흉노족이 연례적으로 침범해 와서 약탈해 갔기에 중국인들이 이를 걱정하고 경계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가을은 절도와 약탈 그리고 전쟁을 걱정해야 하는 계절이기도 하였다.
농심에 상처를 주고 단감을 훔쳐 달아난 도적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해외여행 가듯 교도소에 들어앉아 있을지, 아니면 온화한 아비로, 말 없고 착한 아들로,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우리들 곁에서 태연히 숨 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전부 일어섯 이 자식들아! 친구의 물건을 훔쳐? 모두 의자를 머리 위로 들엇!”
중학교 때였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외쳤다. 급우의 가방 안에 있던 돈과 시계를 누군가 훔쳐갔던 모양이었다. 나무로 된 의자는 무거웠다. 일 분도 지나기 전에 우리는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부들거리는 팔, 죄어오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이윽고 어떤 친구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의자를 털썩 내려놓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 아이를 교실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엎드려뻗쳐를 시킨 후 몽둥이찜질을 가했다. 선생님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가쁜 호흡으로 말했다. “자수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없던 일로 하겠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거칠어지는 숨, 쥐어짜는 듯한 신음소리, 중심을 잡으려 비척거리는 발소리.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모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 무렵 선생님은 의자를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책상 위로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낮은 목소리로 훔친 사람은 조용히 손만 들라고 말했다. 처벌은 하지 않겠으며 모든 것은 비밀로 부친다는 약속과 함께. 만일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반 아이들 모두 계속 의자를 들게 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꼭 감은 눈으로 범인을 원망하면서 어서 이 사태가 해결되기를 바랐다. 말러 교향곡 9번이 끝난 후 지휘자의 손이 멈춰 있을 때처럼 쥐 죽은 듯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됐다. 눈을 뜨고 모두 책상에서 내려와.” 선생님은 안도감이 도는 차분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가셨다. 누군가가 손을 들었던 것이다. 이후 그가 누구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늘은 정말 출근하기 싫더라고. 하루 쉴까 하다가 억지로 나왔네.” 어느 동료 직원의 넋두리였다. 아마도 가을을 타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에게 주말에 가까운 근교로 나들이 좀 다녀오라고 권했다. 가을을 맞으면서 마음이 심란해지는 기분은 아마도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일인 듯하다. 파란 하늘, 서늘한 바람, 갈잎이 뒹구는 스산한 소리를 들을 때면 누구든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픈 마음이 들기도 하니 말이다. 매달려 있던 낙엽이 떨어져 내리고 여름을 지낸 새들이 어디론가 떠나가고, 먼 곳에 있던 새들이 다시 돌아오는 계절에 우리의 마음은 왜 심란해지는 것일까?
이곳저곳을 떠돌던 구석기인들은 한 계절 눌러앉아 지내다가 풀을 뜯는 염소가 자리를 옮기듯 계절이 바뀌면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수렵과 채집이 그들의 생계수단이었으니 말이다. 계절이 바뀔 때 우리가 느끼는 센티멘탈은 그러한 유전인자의 발현 때문은 아닐까? 젊은이들이 모험심이 강하고 낯선 곳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구석기인들의 이동성향 때문이라는 어느 과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과일, 채소를 거둬 먹고 어패류나 날짐승 들짐승들의 생명을 앗아서 단백질을 섭취하는 일은 어찌 보면 약탈의 일종이다. 생명은 태생적으로 또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음으로써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상. 생명체가 지구상에 탄생한 이후부터 시작된 일이다. 무소유의 구석기인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잉여 농산물에 대한 소유 개념이 발생하고 무단으로 타인의 것을 취하는 것은 죄악이 되었다. 이를 금하는 것이 곧 법전의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지키려는 자와 탐하는 자의 싸움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 숙명의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창원단감테마공원의 사무동 바로 뒤에는 아이들의 단감 서리를 모티프로 한 조형물이 있다. 과수원 영감이 작대기를 들고 아이들을 뒤쫓고 세 명의 아이들은 손에 서리한 감을 들고 도망가는 모습이다. 그중 한 아이는 곧 넘어질 듯해서 할아버지에게 혼꾸멍이 날 듯하다. 서리란 당시 시골 아이들이 벌이는 객기쯤으로 치부되어 일정 부분 용인되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일가친척으로 이뤄진 씨족마을에서 그 아이들은 자식 같았을 것이기에 말이다.
농촌의 정겨움을 상징하던 원두막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60 ~ 7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에도 근교 농업이 발달했을 것이다. 인근 도시에 내다 팔기 위한 참외, 포도, 딸기, 수박 등 농작물의 도둑질을 예방하기 위해 농부들은 힘들여 나무와 짚으로 원두막을 만들었을 것이었다. 자식들 공부시키기 위해 피땀 흘리며 지은 작물이 이제 무르익었다. 하지만 소중한 결실을 손쉽게 탐하려는 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아이들이 한두 개 따먹는 것을 잡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량 절도하는 것을 감시하고자 함이었다. 원두막은 그래서 높게 지었다. 추억과 낭만으로 기억되는 원두막이 사실은 절도로부터 농작물을 지키려는 농부들의 고단한 몸부림이었다.
훔치는 대상이 농작물이나 귀중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키르기스스탄에는 ‘신부 훔치기(알라 카추우)’라는 전통이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고 한다. 결혼 적령기에 도달한 남자가 주로 18세 이하 처녀를 훔쳐서 자신의 집에 감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녀의 집에 그 사실을 알리고 신부값을 주면서 동의를 구한 후 결혼식을 올리는 전통이다. 2019년 당시에만 도시에서 20%, 시골에선 60%가 그런 방식으로 결혼이 이뤄졌다고 한다. 강제로 납치되는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사회문제가 되자 정부에서는 법을 강화하고 있지만 전통 관습이라는 인식 때문에 쉬 근절되지 않는다 한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보쌈 전통이 있었다. 통상 조선 후기 ‘개가금지(改嫁禁止)’ 관습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했던 ‘과부 보쌈’이라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총각 보쌈’이 훨씬 더 보편적인 보쌈의 형태였다고 한다. 귀한 집안의 딸이 사주팔자에 둘 이상의 남편을 섬겨야 한다는 점사가 나오면 밤에 외간 남자를 보자기에 싸서 잡아와 신부와 하룻밤을 보낸 후 죽였다고 한다. 그러면 그 귀한 딸은 ‘팔자 땜’을 하였으므로 추후 한 남자와만 결혼생활을 이어갈 것이라 믿었기에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 관습의 이면에는 <경국대전>에 과부의 자식은 과거를 볼 수 없도록 한 법과 ‘아비 없는 자식’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인 인식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러의 교향곡에는 ‘훔친’ 음절이 여럿 있다고 한다. ‘아 유 슬리핑, 브라더 존 ~’ 영어를 처음 배울 때 부르던 이 동요의 원곡은 프랑스 <프레르 자크>라는 노래다. 말러는 자신의 교향곡 1번 3악장에 그 동요를 조만 바꿔서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외에 ‘브루크너 교향곡 4번 3악장, 슈만의 '시인과 사랑‘ 일부분 등도 조를 바꿔 썼다고 어느 음악해설사가 영상에서 설명했다.
“말러 안에는 많은 작곡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예술적인 절도‘로 이뤄져 있죠. 말러는 바그너, 프란츠 리스트, 슈베르트, 베토벤 등을 컬래버레이션하여 교향곡을 만들었습니다.” 유명 음악해설사는 그렇게 덧붙였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성경 구절처럼 순수하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축하고 이뤄놓은 토대를 빌리지 않고서는 나의 존재는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과학사의 거인인 아이작 뉴턴이 했다는 말 “제가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는 다른 이들의 업적과 노력을 빌렸기에 그만의 새롭고 위대한 발견이 가능했다는 뜻이리라.
어느 과학자가 말했다. “훔치세요. 수많은 사람들의 지식을 책을 통해 훔치는 겁니다. 그럴 때 당신은 보다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다. 햇빛과 바람을 친구 삼고 질곡의 시간을 견뎌낸 나뭇잎들은 마침내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든다. 하지만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일교차도 크지 않은 비교적 안온한 곳에 위치한 나무의 잎사귀들은 시퍼렇게 매달려 있다가 처량하게 떨어져 내린다. 다른 이의 성과를 내 것인 양 빼앗는 일. 타인의 소유물을 나의 것으로 속이는 일. 나의 욕심과 만족을 채우려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서 오래 아프게 한 일은 없었는지 돌아본다. 내 인생이 철없고 부끄러움 없이 시퍼렇게, 뻔뻔하고 고집스럽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사색과 독서의 계절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밝고 붉은 복자기 나뭇잎처럼 나도 그렇게 안으로 마음으로 물들고 싶다.
겨울을 앞두고 처연한 꽃을 피워낸 국화의 그윽한 향기를 닮은 그의 선율이 머리에 맴돈다. 작곡가를 꿈꾼 지휘자 말러의 곡절 깊은 인생을 생각하며 상념에 잡혀 있을 때 문득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호박전 먹으러 오셔.” 내 마음을 훔친 아내의 외침이다. 이 가을이 고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