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개똥의 쓸모

by 힉엣눙크

똥꿈을 꾸면 재수가 좋다는 속설이 있지만 잠에서 깨어난 이른 새벽, 그것도 맨발로 똥을 밟는 일은 유쾌한 일이 못될뿐더러 그런 날은 재수도 좋지 않다. 물론 그날의 행운과 불행 지수를 엄밀하게 따져 조사한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하루를 더러운 기분으로 시작했다면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기쁜 일이나 행운이 찾아들어야 할 터인데 그리되기란 사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도 나는 똥을 밟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한 운동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유쾌하지 않은 일, 내키지 않는 가외의 일을 해야만 할 때가 자주 있다. 현관 앞에 떨어져 있는 참새나 직박구리의 똥, 산책로에 뉘어 있는 길고양이 똥을 치워야 하는 일이다. 예전에 반려견 은달이가 살아 있었을 때는 녀석의 큼지막한 똥도 치워야 했다. 귀찮아서 내버려 두거나 피해 다니면 그만이지 하는 안이한 생각을 했다가는 곤란한 일이 꼭 벌어지고야 만다. 맨발 걷기를 하다가 무심히 밟은 똥, 지뢰를 밟은 듯 아찔한 느낌, 찐득하면서 물컹한 불쾌감. 그 순간의 기분을 세 글자로 표현하면 ‘더럽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우리나라 전통 속담도 있지만 우리 조상들은 실제로 개똥을 약으로도 사용했다. 동의보감에 개똥의 효능과 섭취 방법을 설명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사람의 똥도 약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소리꾼들은 대부분 천민 출신이라 먹는 것이 부실한 데다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겪다 보면 몸, 특히 목이 많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화장실에 대나무를 통째로 꽃아 둔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마디 사이 빈 공간에 삼투압으로 맑은 물이 고이게 되는데 그것을 꺼내 한약인 양 마셨다고 한다. 옛 판소리 명창 중에 이 물을 마시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대변이식술은 건강한 사람의 대변 속 미생물을 채취하여 환자의 장(腸) 속에 뿌려주는 치료법이라고 한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 등에선 널리 알려진 공인 치료법이고 우리나라의 저명한 병원에서도 직접 시행하고 있다 한다. 장에는 바이러스, 세균, 진균 등 미생물들이 모여 있는데 이 미생물들 사이에 균형이 깨져 해로운 균이 득세하면 다양한 질환이 발생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건강한 기증자의 대변에서 유익균을 채취하여 환자에게 이식하면 장내 미생물 균형이 개선됨으로써 장염, 우울증, 자폐 스펙트럼, 등의 질병 치료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사람의 똥도 약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똥은 더럽다 느껴지는 것일까? 진화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체의 분비물이나 배설물은 병원균이나 기생충이 번식하기 쉽고 섭취할 경우 각종 질병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혐오하고 멀리하는 개체가 건강하고 오래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류가 똥을 혐오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 이유다.


사자는 코끼리의 똥을 좋아한다.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아주 미친다. 그걸 발견하기만 하면 수백만 원 하는 고급 향수인 양 제 온몸에 비벼 바르고 맛있게 먹기까지 한다. 동물원의 사자가 힘이 없고 기력이 떨어지면 사육사들은 코끼리 똥을 가져와 사자에게 던져 준다고 한다. 그러면 시들하던 사자들이 첫사랑을 만난 듯 두 눈을 반짝이고 심장을 벌렁대며 달려든다는 것이다. 코끼리 똥에는 사자를 흥분시키는 모종의 물질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유전자가 사자를 초식동물의 분변 냄새에 미치도록 추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그와 같은 것은 아닐까?


같은 사람을 바라보면서 어떤 이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또 다른 이는 미워서 꼴도 보기 싫다고 돌아선다. 물론 호감이나 상처가 쌓이거나 대인관계의 경험이 누적된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반응은 우리의 이성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유전자와 무의식의 작용일 가능성이 크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내 몸의 주인이자 명령자라고 여기는 이성 내지 의식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결정된 감정이나 결정을 마치 자신이 선택한 것처럼 여기며 다양한 이유를 끌어와서 그럴듯한 서사로 엮어내는, 일종의 대변인 내지 변호사쯤 된다는 얘기다. 내가 선택하는 일, 내게 일어나는 감정들은 어쩌면 나의 본능이나 무의식의 발현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일, 어떤 직업이나 취향을 선호하는 일, 그런 일을 할 때 의식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거야.’라고 자신하지만 그건 꼭두각시의 착각일 수 있다.


얼룩말은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생긴 것일까,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생긴 것일까. 우리 삶은 행복한데 고통이 몰려오는 것일까, 고통스러운데 행복감이 찾아드는 것일까. 원래 착한 데 악에 물드는 것일까, 근본은 악한데 착한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사랑의 마음에 미움이 끼어든 것일까, 미움의 마음에 사랑이 싹트는 것일까. 어느 것이 맞을까? 사실 얼룩말의 피부는 검은색인데 흰 털이 줄무늬 모양으로 나서 얼룩무늬로 보인다고 한다. 새하얀 북극곰도 털을 밀면 검은 피부인 것처럼.


바람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 말하고 다른 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말하면서 싸웠다. 그 모습을 본 노스님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불교의 <무문관> ‘비풍비번(非風非幡)’에 나오는 이야기다.


북극곰과 얼룩말의 털을 모두 밀어서 피부의 진짜 색깔을 확인하였다 해도 야생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북극곰은 희고 얼룩말은 얼룩무늬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해가 뜬다고 표현하며 그렇게 느끼고 있듯이 말이다. 현대인들 중에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듯이 말이다. 인식의 틀을 벗어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인간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 지각의 틀 안에 형성된 세계일 뿐이라는 얘기이겠다. 똥은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똥은 그저 똥일 뿐이다. 더럽다고 여기는 사람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예전에 반려견 은달이를 데리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갈 때면 커다란 비닐봉지를 준비해야 했다. 단골 장소를 찾아가서 뺑뺑이를 돌다가 응아를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종종 말했다. “참 굵다. 부럽네.” 잦은 음주로 장내 미생물 생태계의 균형이 깨졌는지 가늘고 시원치 않은 아침을 맞고 있던 나는 그놈의 튼실한 변이 부러웠던 것이다. 김이 모락거리는 것을 비닐봉지에 담으면 소똥처럼 묵직했다.


어제 아침, 화장실에서 새똥을 밟았던 오른발을 솔로 문질러서 깨끗이 닦은 후,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내와 나는 죽은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반려견 은달이의 이야기를 아직도 가끔 나눌 때가 있다. 이제는 아픔보다는 담담하게 추억하곤 한다. 권정생 작가의 동화처럼 은달이의 굵은 똥도 어딘가에서 민들레 씨앗의 거름이 되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을 거라며 잔잔한 미소로 회상하던 아내에게 한마디 건넸다.


“내가 은달이의 똥을 참 부러워했잖아? 은달이가 내 소원 하나를 들어준 것 같아.”






keyword
작가의 이전글트로이의 금붕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