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요즘이다. 며칠 전 아침 출근길에 하얀 나비가 코스모스 화단 위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꿀과 이슬을 먹고 사랑을 찾아 떠도는 방랑자. 이제 곧 서리가 내릴 텐데 철없는 나비는 어디를 그처럼 헤매고 있는 것일까?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잎을 갉아먹으며 몸집을 키운다. 쉼 없이 갉아먹는 그네들의 먹성은 놀라울 정도다. 우리 정원에 있는 치자나무에서는 치자꽃을 볼 기회가 좀처럼 없다. 향긋한 치자의 향기를 좋아하는데도 말이다. 왜냐면 내가 농약살포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데다 게으르기까지 하다 보니 애벌레들이 치자나무를 뽕나무인양 여겨 진을 치기 때문이다. 이윽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애벌레는 먹는 것을 멈춘다. 변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몸 안의 조직들이 액체처럼 분해되고 재구성되어 나비로 변태 한다. 이윽고 껍질을 찢고 밖으로 나온 나비. 쭈글거리는 날개를 천천히 펼치고 세상을 향해 날아간다. 이파리 위에서만 살아가던 2차원에서 하늘이라는 3차원으로 비상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애벌레로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생을 살아낸 후 나비로 변태하여 짧은 사랑을 나누고 죽는다. 철 모르고 날아다니던 그 하얀 나비는 지금 제 사랑을 찾았을까?
두개골 속 뇌는 빼내서 버리고 장기는 깨끗이 씻어 단지에 따로 보관한다. 육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소금에 절이고 깨끗이 씻어서 향유를 바른다. 얇은 아마포를 친친 감고 그 위에 다시 수지를 바른 후 정성스레 밀봉한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그들의 죽은 육신을 미라로 만들어서 훗날 나비처럼 환생하기를 꿈꾸었다. 왕족을 비롯한 상류층 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형편에 맞추어 미라를 제작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 그 당시는 굳건한 신앙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르네상스 이후 서구인들이 이집트를 방문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미라가 수천 년간 보존되어 왔다는 점에서 ‘영혼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다는 오해를 한 것이다. 급기야 미라를 만병통치약’이라 여겨 앞다퉈 구입했다. 18세기까지 유럽 대중들은 미라를 육포인양 널리 복용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환생의 꿈은 북쪽에 사는 야만족들에 의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현대판 미라도 있다. ‘인체 냉동 보존’이라는 방식으로 냉동고에 보관된 시신들이다. 불치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 먼 미래의 과학 기술로 그 한계를 극복하여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사람들, 단순히 미래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이 신청을 한다고 한다. 신청자가 사망한 즉시 업체는 시신을 특수처리하여 극저온 냉동고에 보관하게 된다. 먼 훗날 고도의 과학기술에 의해 냉동된 시신이 기적처럼 깨어난다면 그는 아마도 타임머신을 타고 나타난 고대사람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타임캡슐이 되는 셈이니 말이다.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될 것이고,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를 하고 방송에도 출연할지 모른다. 고어체의 말투, 이상한 억양으로 폭소를 유발하는 예능인이 된 고대인. 낯선 미래인들의 이상한 생각과 괴이한 문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뚝 떨어져 홀로 살아간다면 그는 과연 행복할까. 향수병으로 그가 살았던 옛 시절을 경험할 수 있는 가상현실 속에 틀어박혀 눈물로 지새우지는 않을까? 아니면 불사의 생명력, 기적의 마법을 지닌 그의 몸이 만병통치약이라 믿고 미래인들이 그를 뜯어먹으려 들지는 않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나비처럼 이생의 생에서 저 생의 삶으로 변태를 꿈꾸었다. 불로초를 찾던 진시황은 수천 점의 병마용을 무덤에 만들어 넣었으며 수메르의 왕 길가메시는 회춘의 영약을 찾아 헤매었다. 누에고치처럼 깊이 잠들어 있는 고대의 미라와 현대의 냉동인간은 먼 훗날 나비처럼 껍질을 탈피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인류는 오랫동안 노화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대사과정이라 여겨왔다. 그런데 세계보건기구(WHO)가 2018년에 노화를 질병으로 부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의학의 발달로 생명이 연장됨에 따라 노령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고 그들의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리라. 자연의 섭리, 불가역적이라 믿었던 노화를 정복해야 할 의학적 과제로 전환한 것이다. 영원한 생, 회춘하려는 인간의 강렬한 욕망이 과학에 의해 판도라의 상자처럼 활짝 열리게 되었다. 과학과 자본이 결합하여 ‘불사불멸’을 이루어주는 항노화 생명연장이라는 산업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이겨내기보다는 맞이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치료의 가능성은 없는데 신체적 통증이 극심한 환자들은 고통에서 해방되어 편안한 잠에 빠지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런 환자들이 의사의 처방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조력 존엄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지만 스위스를 비롯한 몇 나라에서는 시행되고 있다 한다. 권력과 돈, 명예를 가진 자, 편안하고 행복한 생을 누릴 천운을 타고 난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미련은 더욱 클 것이다. 행복을 지속시키기 위해 불사의 꿈 생명 연장의 기회를 사려 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터이다. 하지만 생이 가져다주는 치밀한 고통 속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삶은 더 이상 존속시키고 싶지 않은 지옥일 뿐이다. 더구나 현대의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데 의미도 없는 극한의 고통을 외로이 홀로 버텨내야 한다면 그 심경이 어떠할 것인가? 만신창이로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는 그런 이별을 방치하는 것이 생명 존중일까? 발달한 의술과 과학으로 신과 자연이 내려 준 유한한 생명을 욕심껏 연장시키면서도 고통받는 사람들의 품위 있고 평안한 퇴장은 왜 외면하는가? 노화가 질병이라며 욕망과 자본의 질주를 불러놓고는 정작 인간의 또 다른 존엄을 등한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힌두교에서는 삶을 네 단계로 나누어 실천하는 ‘아슈라마’라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바나프라스타’라는 시기는 50세 무렵부터 75세까지인데, 그 시기에 접어든 사람은 가정의 책임을 자녀에게 넘기고 숲이나 은둔지에서 영적 수행이나 명상에 전념한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해탈에 이르기 위한 전 단계라고 한다. 마치 애벌레가 몸집을 키운 후 나비가 되기 위해 탈피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사춘기’처럼 장년기에 신체적, 감정적 변화를 경험할 때 사람들은 우스개로 ‘오춘기’가 왔다고 말하곤 한다. 50세 전후에 여성은 폐경을 맞으면서 신체적 정신적인 변화가 오고 남성들도 정도는 다르지만 갱년기 증상을 경험한다. 신체 대사와 정신의 변화는 새로운 도전이고 불안을 초래하지만 한편으로,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고 사유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힌두교의 ‘아슈라마’처럼.
일본의 생물학자이자 교수인 고바야시 다케히코는 <생물은 왜 죽는가>란 저서에서 죽음이란 생명체가 진화를 계속해 나가고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보았다. 생명종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화’와 ‘지속 가능성’을 위해 죽음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탄생이 신비롭고 아름답다면 후세를 위한 죽음 또한 숭고하고 우아한 일이다.
그리스의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필연적인 사건으로 인식함으로써, 현재의 삶에 더욱 충실하고 이성적인 자세로 임하여 정신적 평온(아타락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노자는 죽음이 힘겨운 삶을 마치고 돌아가는 큰 안식처 또는 휴식이라고 보았으며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가장 고유하고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이라고 여겼다.
춤추듯 하늘을 유영하는 나비를 보면서 사람들은 아름답고 자유로운 또 다른 생을 꿈꾼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권력자든 기층민이든 인간은 보편적으로 죽음 너머의 세계에 서사를 부여하였고 영혼의 환생이나 다음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을 희구하여 왔다. 현재의 생이 영원하기를 꿈꾸며 내세에도 무애한 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기 때문이리다.
하지만 애벌레에게 나비는 다음 생도 아니고 환생도 아니다. 하나의 생이 펼치는 다른 모습일 뿐이다. 태어나서 결혼하고 늙어가는 우리의 변화처럼 말이다. 나도 나비가 되고 싶다. 시들지 않는 삶,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려는 게 아니다. 코스모스가 피어 있을 때, 찬 바람이 불기 전에 저 하얀 나비처럼 홀가분한 삶, 자유로운 영혼을 한 땀 한 땀 푸른 하늘에 수놓고 싶다. 오늘도 나는 이파리를 갉아먹으며 나비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