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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가 전하는 말

by 힉엣눙크

집 앞에 오래된 밤나무가 두 그루 있다. 공원이 들어서기 전부터 있었는데 해마다 많은 알밤들이 달렸었다. 대개는 근처 마을 사람들이 대나무 장대로 털어서 따가곤 했다. 공원이 들어서자 이제 밤나무는 시 소유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도 대놓고 털어가지를 못한다. 저절로 떨어져 바닥에 있는 것들을 몇 개 주워갈 뿐이다. 낮에는 떨어지는 족족 마을 사람이나 방문객들이 주워가 버려 찾을 수 없지만 새벽에는 밤새 떨어진 밤들을 제법 많이 얻을 수 있다. 요즘 초저녁 잠이 많아져 나는 일찍 잠자리 든다.


“원아 일나라!”


할머니가 깨우는 소리에 달콤한 단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잠자리를 박찼다. 어둑한 새벽빛 속에서 안개가 어슴푸레하니 아직 새들도 잠을 깨기 전이었다.


어제저녁이었다. 호롱불 아래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에게 일곱 살 먹은 나는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할매예, 꼬옥 내일 아침 이~일~찍 깨배주이소.”


“와? 머할라꼬?”


“홍시 줏을라꼬예. 정만이보다 더 일찍 일나야 됩니더”


이웃집 죽동댁 할머니 집 대봉감이 막 익어가고 있었는데 큰 나무에 주렁주렁한 대봉감 중 잘 익은 것들이 몇 개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낮에는 얻기가 어려웠다. 죽동댁 할머니의 혼구녕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홍시가 담장 안에도 떨어졌지만 바깥 골목길에도 떨어졌다. 바깥보다는 안쪽이 더 많이 떨어졌지만 안쪽 감은 언감생심이다. 바깥쪽 감이라도 얻으려면 사람의 발길이 없는 아침 일찍 가야 했다.


동이 틀 무렵 골목길에 불그스름하게 익어가는 대봉감이 새악시처럼 다소곳이 땅에 내려앉아 있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나는 고사리 손으로 큼지막한 감을 몇 개 주워 들었다. 돌아와 그중 잘 익은 것을 증조할머니랑 나눠 먹었다. 새하얗게 쪽진 머리의 증조할머니는 이빨이 없어서 다른 건 잘 못 드시는데 홍시는 합죽한 입으로 잘 드셨다. 덜 익은 것은 집 뒤 쪽마루 위에 줄지어 보관했다.


그저께 새벽에 죽동댁 할머니 담장에 가보았지만 골목길에는 떨어진 감이 하나도 없었다. 벌레 먹은 생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상하다. 이럴 수는 없는데... 빈 손을 털레털레 흔들며 집으로 향했었다. 그다음 날 이른 아침 다시 골목으로 나섰는데 누군가가 감을 줍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그마한 덩치를 자세히 보니 정만이였다. 내가 부르려고 하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급히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제 나를 빈손으로 만든 건 바로 정만이였던 것이다.


정만이네는 죽동댁 할머니 문간방에 세 들어 살았다. 정만이 아버지는 죽동댁이 할머니 농사를 돕기도 하고 객지에 나가 노동일을 했는데 평소 잘 보기 어려웠다. 정만이 어머니는 생선장사를 했다. 인근 마산 어시장에서 물건을 떼와서 읍에서 팔거나 시골 동네로 행상을 했었다. 위로 두 살 터울인 정희 누나가 있었는데 동생 밥도 챙기고 살림을 곧잘 맡아서 했다. 정만이는 내 또래였다. 나는 정만이와 거의 붙어살았다. 공기놀이, 오징어놀이, 비석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제기차기, 등등 무수히 많은 놀이의 세계가(주로 몸으로 하는) 요즘 PC방 게임 못지않게 재미있었다. 형편이 어려운 정만이네는 항상 꽁보리밥을 먹었다. 쌀밥을 먹던 나는 정만이네 꽁보리밥에 된장이 왜 그리도 맛이 있던지. 철이 없게도 나는 그 집에서 끼니를 많이 해결했었다.


홍시 줍기 경쟁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모자라던 잠의 유혹을 뒤로하고 어두컴컴한 새벽 골목을 나섰던 것이다. 그깟 홍시 주워 무엇하냐고? 그건 돈은 왜 버는 것인가 또는 인생이란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새벽녘 누군가의 손도 타지 않은 대봉감을 들어 올릴 때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성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거기에 경쟁에서 이긴 승자가 느끼는 쾌감도 더해졌다.


바람이 유난히 차갑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시장을 다녀오던 정만이 엄마가 큰길을 건너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떠오른 해에 사라져 버린 이슬처럼 갑작스레 정희 정만이 둘을 남기고 멀리 떠나셨다. 정만이 아버지는 장례를 치르고 얼마 후 이삿짐을 쌌다. 도시로 떠난다고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세간이었지만 세발 용달차에 가득 실렸다. 동네 사람들이 배웅을 나섰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정만이가 고개를 떨구고 아버지 뒤를 따라 돌아섰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볼 것이라는 걸 어린 나이에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어른들 틈을 비집고 걔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기미 낀 얼굴에 콧물 자국이 있는 익숙한 얼굴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붉게 잘 익은 홍시 두 개를 말없이 내밀었다. 정만이가 떠난다는 얘기를 듣고 쪽마루에 놓여있던 대봉감 중에 잘 익은 홍시 두 개를 미리 챙겨 왔던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정만이에게 정희 누나가 다그쳤다.


“머하노 퍼뜩 받아라”


홍시를 받아 든 정만이는 묵묵히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 손을 흔드는 내 모습을 힐끗 본 정만이는 고개를 숙여 홍시를 만지작거렸다. 정만이네를 실은 세발 용달차는 탈탈거리며 언덕으로 가뭇없이 사라져 갔다.


요즘 나이 탓인지 새벽녘에 종종 잠이 깬다. 달아난 잠을 뒤로하고 어둑한 길 위에 떨어진 알밤을 주우면서 문득 홍시 줍기 경쟁을 하느라 쏟아지는 새벽잠을 무릅쓰고 대문을 나서던 그때가 생각났다. 날이 조금 더 차가워지면 홍시도 빨갛게 익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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