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마산시(지금은 창원시로 통합되었다) 인근의 시골에서 자랐는데 그곳은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이제는 내 고향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그 도시의 직장을 다녔는데 마을 앞 국도를 지나는 빨간 가로줄이 있는 시외버스를 타고 통근하셨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시와 달리 근교의 시골은 큰 변화가 없었고 사람들은 아직 순박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고 일부는 도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채소나 과일 등을 공급하는 것을 부업으로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시골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등교할 때면 산기슭 과수원집에 살던 그 친구를 마을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갔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왜 그리도 멀던지. 한 시간 정도는 족히 걸어야 했었다. 혼자서 간다면 무섭고 지루한 길이었다. 철길을 건너고 논밭길을 지나 하천의 징검다리도 건너야 했다. 작은 고갯마루를 혼자 넘을 때는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했다. 학교 가는 아침, 그 친구가 먼저 나오기도 했지만 기다린 건 주로 나였다. 그 친구 이름은 영모였다.
영모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았는지 다리를 살짝 절었다. 멀리 산비탈을 특유의 걸음걸이로 내려오는 모습을 발견하면 나는 손을 흔들곤 했다. 그러면 그 친구도 힘껏 손을 흔들어 화답하며 내려왔다. 학교 가는 길에 노랗게 탱자가 익을 때면 같이 따먹기도 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발맞춰 노래를 부르며 논길을 지나다 올챙이가 보이면 잡아 고무신에 담고 맨발로 걸어오기도 했다.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았다. 누가 더 큰 메뚜기를 잡나, 오줌발은 누가 더 세나 경쟁도 했다. 고갯길을 지나 학교 앞 점빵에서 10원짜리 쫀득거리는 불량식품을 사서 나눠 먹을 때면 마냥 신이 났었다.
그랬던 우리가 그날 이후 영 틀어지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굣길에 티격태격하다 서로 엉겨 붙어 싸웠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컸던 나는 그 친구를 쉽게 제압했다. 영모는 분했던지 휑하니 달려갔고 나는 천천히 뒤를 따랐다. 앞서가던 영모가 손톱 크기만큼 한참을 멀어지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손발 짓으로 욕을 해댔다. 거리가 멀어 욕설은 들리지 않았지만 동작으로 하는 그 욕은 아주 오졌다. 나는 화가 나서 쫓아 뛰었지만 따라잡기에는 너무 멀었다. 영모의 서둘러 가는 품으로 보건대 거기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을 앞에는 고속도로 밑으로 뚫린 굴다리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외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굴다리는 마을의 현관이자 일종의 성문이었다. 굴다리 입구는 날개 모양으로 양옆에 콘크리트 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윽고 마을 어귀 굴다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굴다리 오른편에 초록색으로 선명한 문장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정원이는 공서영을 조아한다’
마을 사람들 다 지나다니는 길목에 대문짝만 하게 내가 같은 반 공서영이를 좋아한다고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장의 번쩍이는 광고판처럼 그렇게 요란하게 홍보를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초등 2년생도 연애편지를 쓴다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발육이 늦어서 이성에 대한 분별 의식이 조숙하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이성을 좋아한다는 표현은 ‘얼레리 꼴레리’하며 놀릴 때 즐겨 써먹는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래서 ‘좋아한다’라는 말은 아주 도발적이고 모욕적이며 베리 베리 디스하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앞잡이란 말보다 더 치욕적이었다. 우습겠지만 그때는 사뭇 진지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조그마한 그 친구가 잡풀 묶음으로 콘크리트 벽에다가 제 키 닿는 만큼, 제 팔이 뻗칠 수 있는 만큼의 높이에다 큼지막하게 그것도 짧은 시간에 찐하게 문질러서 풀물로 글씨를 썼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분노와 열정은 구분이 모호하다.)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나는 초록빛 글씨들을 흙으로 닦아서 지워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풀물은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글자를 변형하기로 했다. 나도 풀을 한껏 꺾어 모아서 그 문장에 가획(加劃)을 했다.
‘점웜이는 공성염을 조아한다’
하지만 영모 그 녀석이 어찌나 세게 눌러썼던지 내가 가획한 것과 원래 글이 조금 구별이 되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어쩌겠는가. 어린 나는 그쯤이면 어느 누구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볼 거야 라며 풀을 휙 던지고 집으로 향했다.
일찍 퇴근하신 아버지가 저녁 밥상 자리에서 내게 한 말씀하셨다.
“공서영이가 누꼬?”
내가 귓불까지 빨개지고 있을 때 후속타가 이어졌다.
“니 그 아를 좋아하나?”
식구들은 아버지께 다들 무슨 영문인지 따져 물었고 설명을 듣자 다들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풀물은 그 후로도 한동안 남아 있었고 동네 사람들을 만날 때면 왠지 나를 보고 웃는 듯 느껴져 부끄러웠다.
영모도 공서영이도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저녁 식탁에서 함께 웃었던 아버지도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얼마 전 고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굴다리 앞에 멈춰 서서 오른편 콘크리트 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초록빛 도발적 풀물은 자취도 없었다. 회색빛 빈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울컥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렁한 눈을 한 채 빙그레 미소 지으며 나는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풀들을 꺾어서 콘크리트 벽에다 문질렀다.
“영모야, 서영아 그리고 아버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