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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을 찾아주세요.

by 힉엣눙크

“내 돈 백구십구만 원을 찾아주세요!”


사무실에 머리가 희끗한 60대 남성이 결기에 찬 굳은 표정으로 경찰을 대동하고 찾아왔다.


그 남성과 관련한 업무를 담당했던 직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요지는 우리 사무실에 와서 자신의 볼일을 보고 돌아갔는데 돈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자신의 동선을 따라 찾아보고 곰곰이 생각해 봐도 우리 사무실 외에는 달리 잃어버릴 만한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린 직원이 말했다.

“여기 제 책상과 서랍을 다 뒤지셔도 됩니다. 제 가방도 드릴게요.”

물론 그 사람은 자신이 두고 간 돈을 우리 직원이 슬쩍 숨겼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한 건 아니었지만 장소를 특정하니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었다. 근처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서 손에 쥐고 있다가 우리 사무실을 방문해 테이블에 그 돈을 잠시 놓은 채 일을 다 보고 돌아갔는데 가다 보니 돈이 없어졌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가는 길에 흘리지 않았으므로 테이블에 그 돈이 있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무실 CCTV를 돌려봐도 뚜렷한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 남성과 경찰은 미해결 상태로 돌아갔다.


돈을 잃어버린 그 남자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애가 타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부주의에 의한 분실임은 본인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돈이 사라진 시점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지나쳐간 모든 것들에 의심의 투망을 던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던 손목에 타투를 한 청년, 비질하던 건물 청소부, 껌을 딱딱 씹고 지나갔던 불량스러운 여학생, 옷차림이 지저분했던 중년 남성, 길바닥에 누워있던 노숙자, 거리를 스쳐갔던 무수한 사람들... 주위 모든 사람이 용의선상에 올랐을 것이고 특히 우리 사무실 직원은 그에게는 유력한 피의자였을 것이다. 벌집을 쑤신듯한 소동 뒤 사무실에 남은 것은 씁쓸함이었다. 그 직원은 결백을 주장하고 싶어도 증명할 길이 없는 억울함 때문에 온종일 소금에 절은 배추마냥 풀이 죽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돈을 잃어버린 사람과 의심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고 있었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애타게 찾으려는 생각에 매몰되어 자신의 인생 한 모퉁이를 상실하고 있었고 의심받는 사람은 억울한 심정으로 자신의 한 귀퉁이를 태우고 있었다. 잃어버린 사람의 상심이 무엇보다 클 것이라는 것은 자명했지만 그로 인해 오해받거나 상처 받는 사람도 생긴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돈을 찾아내기 전까지는.(그러나 돈을 찾아내는 일은 드물다)


돈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은 당연히 찾으려 한다. 그것도 애타게. 그 돈이면 옷이 몇 벌인데... 짜장면이 몇 그릇인데 라며. 액수가 자신의 재력으로 감당할 정도면 서서히 잊히겠지만 금액이 크고 게다가 잘 아는 사람에게서 사기까지 당했다면 몸져 드러눕게 되고 심지어 돈 때문에 목숨까지 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돈을 잃어버리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일부러 버리는 사람도 있다.



전해 듣기로 그는 평범하게 자랐다 했다. 머리는 좋아서 지방 소도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소재 대학교를 다녔으며 어느 기업에 취직했다. 그날은 첫 월급을 찾아들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여느 직장 초년생이었다면 부모님의 내의를 사서 설레는 맘으로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는 술도 취하지 않았고 약도 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창문을 열고 자신의 월급을 그 너머로 던졌다. 봉투 속 현금다발은 바람에 흩날려 낙엽처럼 아스팔트 위에 나뒹굴었다. 그가 탄 택시가 지나간 도로의 교통은 일시 마비되었다고 한다. 현금을 주우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첫 월급을 택시 창문 밖으로 왜 던졌던 것일까. 입시지옥에 내몰려 힘들게 보낸 학창 시절과 취업 경쟁을 뚫고 겨우 시작한 첫 직장생활. 그 모든 수고를 다해서 이 돈 벌려고 내가 공부했나 하는 자괴감이었을까. 혹은 혈기왕성한 청년의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였을까. 또는 직장생활에 대한 환멸로 찾아온 허무와 우울이었을까. 숱한 추측을 남긴 채 그는 이후 꾸준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들었다.


잃어버리게 되거나 또는 자의로 버리게 되는 것들은 돈만이 아니다. 물건, 시간, 사람, 애정, 추억, 우정, 믿음, 신의, 정의, 약속 그리고 강아지.



‘흰색 몰티즈를 찾습니다. 철길 건널목 근처에서 잃어버렸어요. 2살 수컷이고 이름은 담비예요.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찾아주시는 분께 사례하겠습니다. “ 개를 잃어버린 누군가가 절박하게 전봇대에 전단지를 붙여 놓았다.

전단지에는 애절한 글과 함께 흰색 몰티즈가 붉은 혀를 살짝 내밀고 있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종이는 10여 미터마다 하나씩 붙어 있었는데 일정한 높이로 잘 떨어지지 않게 네 귀퉁이를 테이프로 정성껏 붙여 놓았다.

애절한 견주는 결국 개를 찾았을 것이다. 이전과 달리 개를 잡아먹는 사람들의 수가 현격히 줄어든 데다 그와 반비례하여 개를 잃어버린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개를 잃었을 때 찾으려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집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다. 도심 근교다 보니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많다. 이상하게도 가족끼리 와서 가족 하나를 놓고 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또 하나의 가족 바로 ’ 개‘ 나 ’고양이‘ 말이다. 주인을 잃은 개들은 공원 주위에서 마치 늑대 무리처럼 떼를 지어 몰려다녀서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삼 년 전 겨울. 우리 집 담장 밑으로 기어 들어온 개가 있었다. 이름은 넘이(우리는 잠시 그렇게 불렀다. 담넘이에서 ’담'자를 뺐다.) 흰색 잡종견이었는데 붙임성이 좋았다. 스스럼없이 담을 넘어와서는 눈웃음과 꼬리 치기로 애교 필살기를 펼쳤다. 그 모습을 본 은달이는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다. 으르렁거리며 잡아먹을 듯이 쏜살같이 달려갔다. 침입자는 담장 밖으로 도망가지 않고 예상과 달리 침착하게 뒤돌아 앉아 몸을 움츠렸다. 이빨을 드러내고 완전히 끝장을 낼 듯 달려간 은달이는 의외로 넘이의 엉덩이를 코로 콕 찍기만 했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미미했다. 그 순간 ”깨애~앵“ 하는 넘이의 외마디 비명이 정적을 갈랐다. 엄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넘이 보다 덩치가 다섯 배나 큰 은달이를 나무랐다.


”은달! 친구를 괴롭히면 안 돼 “


그 개는 나를 너무 따랐다. 오라고 하면 귀를 뒤로 젖히면서 꼬리를 살살 흔들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배를 드러내고 귀염을 피워댔다. 은달이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다음날 퇴근했더니 그 녀석이 대문 앞에 와서 꼬리 치며 나를 반겼다. 은달이는 평소처럼 저만치 그냥 누워있기만 했는데 말이다. 전생이란 것이 있다면 은달이는 아마 곰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넘이 그 조그만 것이 새카만 눈동자로 꼬리 치고 따르니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그 개를 이뻐하면 할수록 아내는 소외받는 은달이를 염려했다. 넘이가 우리 집에 무단 침입한 지 사흘째가 되었을 무렵 출근하려고 아내와 함께 마당으로 나섰을 때였다. 은달이 집을 바라봤는데 집 안에 있어야 할 은달이는 추운 겨울, 시멘트 바닥에서 자고 있었고 이불이 깔린 은달이의 따뜻한 개집에서는 넘이가 곤히 자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주객이 전도된‘ 그 장면을 본 아내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의 의미를 사각적으로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은달이는 넘이 보다 덩치가 5배는 족히 넘는다는 것이었다.




내 어릴 때 먼 친척이 있었는데 속을 무던히 썩인다는 그분들의 자녀는 고등학생이었다. 나도 그를 아는데 키는 중간치보다 조금 작았다. 왜소하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눈빛은 형형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학교의 일진이었다. 덩치가 산만한 자신의 또래 친구들을 하인처럼 거느리며 왕 노릇을 했다 한다.(폭력과 관계되는 일들로 부모님은 담임의 연락을 받고 여러 차례 학교를 방문하고야 그 실체를 제대로 알게 됐다고 한다. 좀체 믿지 못했던 이유가 집에서는 너무나 순한 아이였다는 것이다.)

싸움은 힘과 덩치로 하는 것이 아니다. 덩치가 산만하고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대개 아내의 말을 잘 따르지 않던가. 은달이는 굴러들어 온 일진에게 밀린 떡대남이었던 것이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아내가 넘이를 더 이상 놔둘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왜 귀엽고 똘망한데 그냥 우리가 키우자“ 그랬다.


하지만 아내는 넘이가 은달이를 제압하면서 은달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사실 은달이는 예전같지 않게 뭔가 나사가 빠진 듯 평소 하지 않았던 이상행동을 시작했다.


아내는 동네를 다니면서 개를 잃어버린 집이 있는지 수소문했다. 이장에게는 마을 방송을 통해 개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도 했다. 다시 하루가 지났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공원에 놀러 온 외지인이 버린 개거나 떠돌이 개가 확실해 보였다. 아내는 은달이의 자리를 꿰차는 넘이를 그냥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제주도 이효리처럼 유기견을 수용하고 키울 정도의 아량을 가지지는 못했다.


아내는 다음날 유기견센터에 연락했고 센터 직원들이 와서 넘이를 데려갔다. 넘이는 목줄에 묶인 채 순순히 따라가더라고 했다. 내가 정을 좀 줬던 모양이다. 퇴근해서 그 얘기를 듣는데 허전했다.


이후 은달이는 제 집에서 포근한 깔개에 누워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유기견센터로 들어간 그 개는 공고 기간이 지나고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거나 입양을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도 안락사 당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돈을 애타게 찾듯이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택시 창밖으로 돈다발을 던지듯 나의 허물과 욕심을 미련없이 버릴 수 있기를...


기후변화로 역대급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이런 저런 생각들이 일어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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