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일 막스 플랑크 신경생물학연구소 연구진들이 쥐들도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그 기사를 읽었을 때 만화영화 ’라따뚜이‘가 떠오르면서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어린이들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의인화한 동물들의 세계가 만화 속에서는 차고 넘치니까.
동물들이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일화를 들으면 그들의 단순한 본능이 사람의 눈에는 유의미하게 보였겠지 혹은 우연이 빚어낸 오해였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골로 들어오니 동물들이 다가왔고 그러면서 그들의 사생활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되었다. 또한 동물들과 친해지기 시작하자 도시에서 바쁘게 살면서 놓치고 있던 것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들도 사람들과 별 차이도 없다는 사실, 인간은 동물을 먹어야 한다는 진실, 그리고 우리가 먹어야 하는 것들은 무생물화해서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 인간의 존엄이나 고귀한 영혼 등등 사람과 동물을 구분 짓기 좋은 말들의 허물을 뒤늦은 나이에 깨닫고 있다는 의식.
작년에 내가 겪었던 사건도 그 같은 일의 하나였다.
여러 해 전에 집 정원에 블루베리를 심었다. 30~50센티 정도 되는 묘목을 욕심부리지 않고 세 개만 사서 심었다. 블루베리는 토양을 가리는 성질이 있어 키우기 까다롭다는 얘기를 들은 데다 우리 집 정원은 척박해서 잘 키울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특하게도 심은 첫해부터 열매가 제법 달렸다. 익은 것들을 골라 몇 개씩 따다가 먼지만 씻어내고 접시에 담으면 짙은 자줏빛 껍질에 물기가 이슬처럼 맺힌 모습이 예뻤다. 후식으로 하나를 깨물면 새콤 달달한 맛이 톡 하고 터져 나왔다. 마트에서 사서 먹었다면 한주먹 입에 털어 넣고 훨씬 큰 단맛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정원에서 자란 블루베리는 크기도 작았을 뿐만 아니라 소박하면서 거친 맛이 있을 뿐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특별하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수확량이 워낙 적다 보니 대여섯 개를 따오면 금세 다 먹고 마지막 한 개가 남았다. 아내와 나는 귀한 과일인 양 서로에게 양보했다.
심은 지 3년째 수확기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좀 더 익으면 따먹어야지 하고 아꼈다가 다음날 가 보면 안 보이고 또 조금 더 기다렸다 따야지 하면 없어지고. 수확의 기회는 자꾸 박탈당했다.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아내는 블루베리 가지에 앉아서 잘 익은 열매만 골라 따먹는 직박구리를 발견했다.
직박구리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자생하는 텃새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몸 전체가 잿빛이고 뺨은 갈색이다. 날아다닐 때는 파도나 시소를 타듯 오르내리며 비행한다. 뚜렷한 특징이 별로 없어 식별이 어렵지만 도심지 공원 등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찾을 수 있다. 처음 그 새를 바로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소리를 듣고 찾는다면 쉽다. 요령은 간단하다. 듣기 싫은 소리로 우는 새를 찾으면 그 새가 바로 직박구리이기 때문이다. 길게 ’삐이~익‘ 혹은 짧게 “삐익 삐익’ 하고 우는데 들으면 뭔가 신경질적인 소리처럼 들린다.
털 색깔도 칙칙하고 머리 쪽 깃털은 간혹 ‘나 화났어' 하는 투로 조폭처럼 쭈뼛 곤두서기도 한다. 게다가 애지중지 키워놓은 과일을 그것도 잘 익은 것들만 족족 먹어 치우니 밉상이지 뭐겠는가.
과일이나 채소를 기르지 않았다면 그 새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존재조차 몰랐을 수도 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고 심지어는 이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나의 이해관계와 얽히거나 생활반경 내에 침입하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단 새뿐이랴.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음 한 곳에 미움이 싹트면 멀리하고 싶고 사랑스러우면 좀 더 가까이하고 싶은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게 되는데 여기서 더 강해지면 물리적 행위를 수반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과 관심을 종내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파국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집착이라는 특급열차는 질주하게 된다. 나의 감정에 매몰되어 그것이 진실이라고 확고해지는 순간부터 타자의 감정이나 이해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애증이라는 감정의 가시가 내 가슴 깊이 박히면 자신이 받는 고통을 외부 대상으로만 투사하려 하고 오로지 배척이나 애착의 프리즘으로만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증오와 아집이 사랑 또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여 비극으로 마감되는 것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는 물론, 우리 주변에서도 익숙하게 볼 수 있지 않은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내 마음속에서도 벌어지는 일들이다.
직박구리의 만행을 열거하자면 한참 걸리겠지만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얘기해 보려 한다. 앞서 언급한 블루베리는 물론이고 토마토도 마찬가지다. 빨갛게 익을 무렵이면 여지없이 부리로 쪼아서 먹지 못하게 만든다. 다 먹지도 않으면서 한번 콕 쪼아서 맛만 보는 심사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토마토는 다 익기도 전에 서둘러 따내야 한다.
감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농약을 안 치니 가을에는 수확할 것이 별로 없다.(농약을 치기 싫은 것 7할, 게으름 3할) 집 주변에는 온통 감나무 과수원인데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유능한 이웃들의 단감은 과육도 실하고 당도도 높다. 사람들은 과수원 하면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하는 동요를 떠올리며 낭만적으로 생각한다. 과수원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단감나무 과수원은 가혹한 노동을 먹고 산다. 돌아서면 자라나는 풀들을 수시로 베야 하고 수확철에는 부지깽이 손도 절실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거의 한 달에 두 번씩은 농약을 쳐야 한다. 사방팔방 과수원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어떻겠는가? 오늘은 옆에서 내일은 뒤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쉴 새 없이 농약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창문을 닫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살포되는 원점과 나와의 이격거리 및 민감도의 함수관계로 결정된다.) 요즘은 농약 치는 전문차가 따로 있는데 진공청소기를 바로 옆에서 트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야튼 집 주변에 그런 관심과 사랑을 받은 감들로 홍수를 이루는데 그 많은 감 다 놔두고 직박구리님은 우리 집에 홀대받고 자라난 딱 두세 개 있는 감만 콕콕 찍어서 잡수셨더랬다. 취향은 친환경 유기농만 선호하는 백화점 VIP 수준이다.
또 봄에 매화꽃 목련꽃이 화사하게 피어날 때면 흐뭇하게 감상하고 있는 우리 앞에 어느샌가 직박구리 녀석이 나타나서 꽃잎을 먹어치우거나 혹은 그냥 똑똑 따내는 것이었다. 이쁜 꽃을 더 오래 보고 싶고 봄볕같이 화사한 기분 더 길게 느끼고 싶은 우리 마음에 찬물을 확 끼얹는 것이다. 직박구리 흉을 한참 늘어놓고 보니 흥부가의 ’놀부심술대목‘ 비슷하다.
작년 초여름 블루베리 수확철을 앞두고 올해는 그냥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블루베리 나무에 그물을 쳤다. 효과는 있었다. 엉성하게 치긴 했지만 직박구리의 서리질을 잘 막아내주었다. 새카맣게 익은 블루베리를 이전과 같이 수확할 수 있었고 우리는 아침의 소소한 행복을 다시 누릴 수 있었다. 그물은 보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동안은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아침 수확을 하려다 블루베리 나무에 쳐놓은 그물에서 뭔가가 푸드덕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뒤따르던 은달이가 튕기듯 달려 나갔다. 말릴 새도 없이 그물에 걸려있던 녀석을 덥석 입에 물었다. 은달이는 조상 대대로 DNA 속에 축적된 사냥본능에 충실했을 것이다. 아내는 황급히 은달이 입에 물려 있는 것을 빼앗으려 했지만 좀체 입을 열 수 없었다. 한참을 씨름하다가 먹이로 유인하니 그제야 입을 벌렸다. 그물과 함께 은달이 입에서 힘없이 툭 떨어진 물체는 우리의 얄미운 악당 직박구리였다. 블루베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직박구리가 그물의 엉성한 틈새로 들어가서 포식한 후 급히 나오다가 날개 끝이 그물에 걸렸던 것이다. 그토록 얄미웠던 새였지만 숨이 끊어진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털이 은달이 침으로 흠뻑 젖어서 제 몸에 착 달라붙어 평소 모습보다 훨씬 왜소해 보였다. 초라하게 늘어져 있는 몸뚱이에서는 활개를 치고 날아다녔던 기운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사달을 낸 은달이를 나무랐지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껌뻑거렸다. 그래 니가 무슨 죄가 있겠냐 잘못이라면 당초 그물을 친 내가 잘못이지 하고 야단질을 관두었다.죽은 녀석을 땅에 묻어주고 돌아서는데 바로 옆 나무 위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삐이~익, 삐이이이~익“
올려다보니 직박구리였다. 아마도 죽은 직박구리의 짝인 것 같았다. 생명을 잃은 제 짝이 근처 땅에 묻히고 있는 동안에도 날아가지 않고 바라보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던 것이다. 직박구리가 그렇게 오래 머물며 울었던 적은 그때까지 없었다. 울음소리가 애절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다음날 저녁 퇴근하고 집에 오니 아내가 말했다.
”오늘도 직박구리 죽었던 곳 주변에서 다른 한 마리가 한참을 울다가 날아갔어. 아마 어제 걔였던가봐.“
나는 어둠이 짙어오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사랑을 잃은 직박구리는 둥지 속 비어있는 공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제 짝이 다시 날아와 주기를, 어제의 일들이 꿈이기를, 이전처럼 같이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아다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그리움에 사묻혀 눈물짓고 있었을까. 어쩌면 가슴 한 쪽 저리게 아파오는 곳을 부리로 그저 쓸고 쓸고 또 쓸고 있었을지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인간의 전유물로 여겼던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오만과 무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선사시대의 위험이나 고통 그리고 궁핍을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맞이했지만 오래전 뭇 생명들과 함께했던 공존의 지혜는 우리에게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목숨을 받아 살아내는 것들의 운명, 무리 짓는 개체들이 지니는 숙명. 나만의 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나의 가진 것에 마음이 빼앗길수록, 소중한 것에 대한 상실감이 클수록, 그러한 내가 타자로부터 이해받지 못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직면하게 된다. 바로 외로움이다. 사랑(eros)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한동안 어둠을 바라보다가 나는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 블루베리 나무에 걸려있던 그물을 말없이 걷었다. 그 이후 블루베리 열매는 수확하지 않았다. 우리가 기르는 작물들을 벌레가 되었든 새가 되었든 먹어대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게 되자 직박구리는 얄미운 악당에서 그냥 새가 되어 우리 곁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