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익숙해지는 것들

by 힉엣눙크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 집 참새들은 겁이 없다. 불과 50cm, 손을 뻗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온다. 은달이에게도 마찬가지다. 땅바닥에 퍼질러 누워 있으면 주둥이로부터 불과 반보 거리까지 참새는 스스럼없이 내려앉아 모이를 찾는다. 악어새처럼 은달이 이빨 사이에 낀 것도 찾아 먹을 기세다.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8년 전만 해도 10여 미터 이내로 다가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참새와 사람의 이격거리, 즉 그래야만 할 정도의 거리를 자연스럽게 유지했었다. 그러던 애들이 낯이 익고 익숙해지니까 5미터, 3미터 점차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참새 여드름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막역해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볼 때 순전히 은달이 때문이다.(잘못된 것은 무조건 은달이를 탓하는 나의 습관을 보고 아내는 말없는 동물에게 모든 책임을 덧씌우는 비겁한 행위라고 냉정히 비판했다.) 어쨌거나 참새들은 이 집을 접수했고 녀석들은 이제 겁을 상실했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아침에는 알람이 필요 없다. 어스름하게 새벽빛이 어둠을 몰아낼 즈음이면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한 두 마리 참새가 짹짹거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에 반쯤 의식이 돌아올 때 나머지 무리들의 떼창이 일제히 시작된다.


"위 윌 위 윌 롹큐... "


그 무렵까지 계속 잠을 이룬다는 것은 ‘어버가도모린다’ 수련을 연마한 잠탱이 본좌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참새 창궐의 첫 번째 원인은 지붕이다. 스패니쉬 기와를 얹었는데 처마의 기와가 끝나는 부분에 구멍이 뻥 뚫려 있어 참새들의 입주 유혹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플라스틱으로 된 새막이(새가 둥지를 못 틀도록 구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집요한 참새들의 욕망에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집을 짓고 나서 두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참새들은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는지 기와 끝 구멍마다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참새들에게 무상으로 연립주택을 제공한 자선가가 되었다.


두 번째 원인은 풍부한 먹이다. 아내가 참깨를 수확해서 처마 밑에 말려두면 참새들은 이웃마을에 사는 먼 일가친척까지 초대해서 만찬을 즐겼다. 은달이는 뭘 먹을 때 꼭 흘렸는데 그것도 많이 흘렸다. 말할 것도 없이 은달이가 흘린 부스러기들은 참새들의 좋은 모이가 되었고 게다가 은달이는 한 번씩 속이 안 좋을 때면 풀을 뜯어먹었다.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나는 그 말이 전혀 사리에 맞지 않을 때 쓰는 속어로 생각했었는데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개들은 속이 안 좋으면 풀을 먹음으로써 장 청소를 한단다. 항균제, 구충제, 진통제 용도로 풀을 뜯어먹는다는 것이다. 내 목격담으로 개가 풀을 뜯어먹는 것은 명백한 팩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바흐의 ‘양들은 평화로이 풀을 뜯고’(Bach BMV 208: Sheep May Safely Graze)가 저절로 들릴 정도로 은달이는 잔디밭에서 한 마리 어린양이 된다. 양처럼 너무나 양처럼. 우리가 양을 키웠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찰지게 풀을 뜯는다. 이윽고 뱃속에 풀이 꽤 가득 찰 무렵이면 은달이는 웩웩거리기 시작하고 잔디밭 한 모퉁이에 내용물을 전부 게워놓는다. 바로 그때부터 참새들의 축제가 시작된다. 이놈 저놈 서로 앞다투어 몰려와서는 먹이 쟁탈전이 벌어진다. 다음날이면 은달이가 제공한 잔치음식들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러니 참새들이 어찌 은달이를 좋아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은달이는 참새들의 밥이다.


방생은 물고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집안에 벽난로를 뒀다. 겨울철 타닥거리는 장작불빛이 온 집안을 따스하게 할 것이라는 낭만을 가지고 설치했는데 일정 부분 그런 예상은 현실에서도 맞았다. 하지만 무거운 장작을 나르고 아침에는 타고 남은 재도 치워야 하는 또 다른 현실도 맞닥뜨려야 했다. 깔끔하고 편리한 디지털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장작난로는 불편하고 지저분한 아날로그 세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훈훈한 만족감이 없다면 아마도 벌써 철거되었을 터이지만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거운 주철 덩어리는 아직 벽 한쪽에 남아 철마다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참나무 장작의 일렁이는 빨간 불빛을 멍하니 바라다보노라면 한겨울 찬바람에 얼어 있던 심장이 따스해지는 것을 분명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복잡했던 스트레스와 번뇌들이 홀홀 타오르는 불꽃 속으로 가만히 사라지는 느낌도 가질 수 있다. 호일에 감은 고구마를 자연 방출 원적외선에 달콤하게 구워 먹는 재미는 덤이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지붕 위 난로 연통의 끝에서도 연기는 사라지게 되는데 그 무렵이면 참새들은 짝짓기를 시작하고 신혼집 마련에 분주하다. 다음 겨울을 위해 깨끗이 청소한 난로 안에서 뭔가 푸더덕 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 것도 그때였다. 연통을 두드리고 긁고 하는 소리에 두려움으로 살펴보던 아내는 난로 유리에서 참새와 눈이 딱 마주치게 되었다. 신혼집을 마련하려던 참새가 난로 연통 구멍을 비집고 들어와서는 그만 갇히게 된 것이다. 새카맣고 땡그란 참새의 눈동자를 그토록 가깝게 본 적이 없었던 아내는 기겁을 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나를 불러 의논했다. 난로 문을 섣불리 열었다가는 뛰쳐나온 참새가 집안의 하얀 벽을 온통 잿가루로 뒤덮을 것이 뻔했으므로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궁리 끝에 모기장을 난로 입구에 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바로 뛰쳐나올 것 같던 참새는 두려움에 오히려 연통 안으로 기어들었다. 우리는 난로 옆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휘리릭 참새가 날아 나와서 모기장에 걸렸다. 그때 잽싸게 모기장을 오므렸다. 검댕이 묻은 참새는 짹소리도 안 하고 조용히 있었다. 마당으로 나와서 그물을 조심스럽게 열었더니 그 녀석은 후드득 날아올라 빨랫줄같이 일직선을 그리며 뒤도 안 돌아보고 멀리 날아갔다. 그 후 두 번의 봄을 더 맞이할 때마다 아내는 굴뚝으로 날아든 참새를 방생해야 했다.(참새구이를 해야 한다는 나의 흰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익숙해지는 것들

느리게 변화하는 것들은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새벽이나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는 끝없는 어둠의 깜깜한 밤과 지루한 한낮이 헛된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원할 것으로 생각되던 고통과 슬픔도 세월 속에 그 아픔의 기억이 점점 바래져 가면 그 속에 오래 머물렀던 나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자각의 기회가 주어지는 변화의 순간들이 그래서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빛이 기우는 저녁이나, 밤이 사라지는 새벽의 찰나는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오늘도 저녁 마당에서 조그만 라디오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듣는다. 바흐의 칸타타 BMV 156, 2악장(일명 Arioso)을 편곡해서 부르는 브라질의 플라비오 벤츄리니와 카에타노 벨로주 두 명의 노랫소리를 들으니 편안하다. 이런저런 인생의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맞이하는 황혼을 닮은 음악이 있어 저녁이 더욱 아름답다.


은달이는 바닥에 퍼져있고 참새는 그 주변에서 깡총거린다. 때가 되니 익숙해진 그들 사이처럼,

붉게 물드는 저녁이 내게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IMG_5794.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