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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미 국물은 왜 시원한가?

by 힉엣눙크

점심 식사를 위해 직원들과 아귀찜 집에 갔더니 잘 차려진 반찬 중에 동치미가 눈에 띄었다. 반가운 마음에 무를 집었다. 아삭 거리는 식감. 청량한 국물. 목구멍을 넘어가며 속을 시원하게 만드는 느낌. 마치 오랜 지기를 우연히 만난 듯 맛으로 느끼는 정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무를 우적거리는데 한 생각이 입안을 맴돌았다.

70년대 말, 어린 나는 가족들과 함께 마산으로 이사 왔었는데 요즘은 온수 파이프가 깔린 온돌이 대부분이라 시골에서도 아궁이를 보기 어렵지만, 그때는 도시에서도 주택에 아궁이와 구들장 그리고 굴뚝이 있었다. 연탄의 뜨거운 열기가 방 구들장 밑을 구불거리며 돌아서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부엌이 지금처럼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과 연결되어 있는 입식 형태가 아니라 별개의 공간으로 나뉘고 한 칸 정도 낮게 지어져서 불편하게 오르내려야 했다. 게다가 신발까지 신어야 했으므로 사실 또 다른 현관이었다. 우리 가족이 이사 간 그 집은 한옥이 아니었고 당시로서는 신식인 슬라브 형태의 연립주택이었음에도 그러했다. 동네는 같은 구조의 집들이 횡대로 죽 늘어서 있었고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너도나도 연탄을 주문해서 창고에 가득 쌓아두고 추위를 대비했다. 김장김치를 담는 시기와 비슷했던 것 같다. 차곡차곡 배추를 쌓듯 리어카로 배달된 연탄들을 들이는 것이 집집마다 초겨울의 연례행사였다.


번개탄과 신문지로 연탄에 불을 지피고 아궁이에 두 개를 위아래로 넣어두면 벌겋게 타오른 연탄은 금세 하얗게 변하고 만다. 일정 시간마다 연탄을 갈아주어야 했는데 겨울 추위에 옷깃을 여미며 연탄을 가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주로 그 역할은 주부들의 몫이었지만 제법 자란 아이들에게 맡기기도 했다. 갈아 끼우는 것은 간단했다. 아래쪽 다 타버린 연탄을 제거하고 불이 붙은 위쪽 연탄을 아래쪽에 둔 후 새 연탄을 그 위에 올려두면 끝이었다. 이 작업은 연탄집게로 해야 하는데 집게를 너무 세게 잡으면 연탄이 깨지고 느슨하게 잡으면 떨구기도 해서 세심한 힘 조절이 필요했다. 또한 그냥 놓아서는 안 되고 아래위 연탄끼리 서로 구멍이 일치하게 퍼즐 맞추듯 잘 놓아야 했다. 구멍이 안 맞으면 공기가 통하지 않아 자칫 불이 꺼져버리는 낭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궁이 불구멍 조절도 잘해야 하는데 너무 많이 열면 일찍 타버리고 너무 작게 열면 방이 추웠다. 때로 연탄을 갈다가 옷을 태우기도 하고 아래위 붙어버린 연탄을 떼어 내다가 왕창 깨뜨려버려 혼이 나기도 했다.


연탄이 마냥 귀찮고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겨울철 “찹쌀~떠~억”하는 떡장수의 구성진 외침 소리가 들리면 평소에도 끝없는 먹성을 자랑하던 우리 형제들은 고인 침을 삼키며 연탄불에 고구마나 군밤, 쥐포나 오징어 그도 아니면 쫀드기라는 불량식품이라도 구워서 먹었다. 복숭아뼈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아랫목에 누워 빌려온 만화책을 보다가 출출해질 때 라면을 끓여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지금도 몸살 기운에 으쓸해질 때면 그 절절 끓던 아랫목이 몹시 그립다.


당시에는 건물의 단열이 형편없어 추위가 안팎을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바닥은 데일 정도로 뜨거웠지만 후하고 불면 입김이 하얗게 보였고 아침에 일어나면 코가 시렸다. 밥상을 깨끗이 닦아서 책상 삼고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엉덩이는 뜨거웠지만 차가운 웃바람 때문에 두꺼운 외투도 모자라 이불을 망토처럼 두르기도 했다. 대개 밥상보다는 아랫목에 배를 깔고 이불을 덮은 채 누워서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눈은 스르르 감기고 먼 꿈나라에 가는 것은 다반사였다. 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해 식구들은 서로 밀치고 당기고 했다. 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낮에도 이불을 항상 깔아 두었다. 어린 우리들은 겨울철 그것도 아침에 이불속에서 나오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위협을 느낀 소라고둥이 제 껍데기 속으로 말려 들어가듯 엄마의 기상 호령에 우리는 이불 깊숙이 몸을 숨기고 앙버티기 일쑤였다.

동지 팥죽을 먹을 무렵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던 한밤중, 나는 괴롭게 뒤척이다 잠이 깼다. 어지러움에 비척이며 문을 열고 거의 기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다른 방에서 주무시던 부모님이 인기척을 느끼고 깨서는 왜 그러냐고 물으셨다. 나는 머리가 아프고 메슥거린다고 말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벌컥 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옆방 문을 열고 동생들과 할머니 그리고 고모를 큰소리로 깨웠다. 아버지는 한 사람씩 방에서 끌어냈다. 다들 약 먹은 병아리처럼 힘없이 늘어졌고 할머니는 제대로 깨지도 못하셨다. 아버지는 모두를 마당으로 끌어내어 차가운 공기를 마시게 했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다들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지만 할머니는 의식을 아직 차리지 못하셨다. 부모님은 번갈아 식구들 이름을 부르며 괜찮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다. 고모는 의식이 없는 할머니를 흔들어 부르며 엉엉 울었다. 마치 집에 폭격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옆집 용이네 집 창문에 불이 들어오더니 곧 용이네 부부가 잠옷 바람으로 우리 집으로 뛰쳐왔다. 용이 아버지는 사태를 파악한 즉시 할머니를 들쳐업고 아버지와 함께 가까운 병원으로 내달렸다. 119도 없었던 시절이라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때였다. 우왕좌왕하던 엄마에게 용이 엄마가 큰소리로 외쳤다.

“동치미 국물 갖고오이소.”


마당에 앉아 있던 우리들은 용이 엄마가 건네준 동치미 국물을 마셨다. 탄산처럼 톡 쏘는 새콤한 국물이 속으로 들어가자 온몸이 시원해졌다. 아기가 생을 향한 본능으로 엄마 젖을 삼키듯 나는 꿀꺽이며 동치미 국물을 들이켰다. 해독의 효과가 나타난 것일까 두통과 메스꺼움이 차츰 사라졌다. 크게 숨을 쉬라는 용이 엄마의 말대로 고개를 젖혀 콧구멍을 벌렁일 때 검은 벨벳 같은 하늘 위에는 보석처럼 박힌 별들이 겨울바람을 맞으며 무섭도록 시리게 반짝였고 점점 더 선명하게 빛났다. 생사의 기로를 넘어서며 보는 세상이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한바탕 난리가 난 다음 날 할머니도 의식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 겨울철에는 구들 틈새로 스며드는 일산화탄소 일명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일가족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접하는 것은 흔한 일상이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일찍 발견되어 참사를 면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그 사건 이후 아버지는 구들을 없애고 온수 파이프가 지나는 온돌로 바닥공사를 했지만 기름보일러가 보편화되기까지 한동안은 연탄을 사용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사람에게 동치미 국물은 사실 별 효과가 없다고 한다. 자칫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마시게 했다가는 기도를 막아 질식사하거나 아니면 폐렴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의사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때는 연탄가스 중독에 동치미 국물이 상식이었다. 속담에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 김칫국은 동치미 국물을 말한다. 얹혀서 소화가 잘 안 되면 동치미 국물을 마셨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실 동치미 국물에는 디아스타아제라는 효소가 들어 있어 소화에 도움이 된단다. 아마도 사람들은 동치미 국물이 속을 시원하게 하니 연탄가스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 자연스레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당시 동치미는 서민들에게 한겨울 불시에 닥치는 곤경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마주한 동치미는 한밤중 잠옷 바람으로 급히 달려와서는 의식 없는 옆집 할머니를 들쳐업고 내달리던 용이 아버지와 위기에 빠진 이웃을 가족처럼 보살펴주던 용이 엄마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게 했다. ‘먼 사촌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당시에는 정말 유효했던 시절이었다. 이 계절 동치미 국물이 시원하면서도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올겨울에는 아내에게 얘기해서 동치미를 담가볼 작정이다. 국물이 시원하다면 이웃에게도 권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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