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화장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집 안에 타일로 마련한 방에 반짝거리는 양변기, 비데기와 세면대 그리고 샤워기일 것이다. 너무나 편리하고 쾌적한 데다 배설과 목욕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다.
하지만 내 어릴 적엔 화장실 하면 세 가지를 떠올렸었다. 첫 번째, 말 그대로 변소다. 재래식 화장실로 나무판 아래에 배변 무더기가 현존하고 있고 그 실체를 향기로 생생히 맡을 수 있는 곳이었다.
두 번째는 요강이다. 캄캄한 겨울밤에 소피는 마렵고 변소까지 가자면 옷 속을 파고드는 한기와 외출하듯 신발을 신고 다녀와야 하는 번거로움에 그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당시에도 따뜻한 방 안에서 그런 불편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요강이었다. 하지만 단점이 있었는데 머리맡에서 다른 식구의 오줌 누는 소리를 스테레오 사운드로 생생히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오줌통이다. 농사짓는 농부들에게는 사람의 똥오줌도 아주 소중한 비료였다. 그래서 옹기로 된 단지를 마련해서 오줌을 따로 모았다. 남자들은 편리해서 좋고 소변을 따로 모아 삭혀서 밭작물 거름으로 활용하니 좋아 일석이조였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도 새마을운동은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자고 한창이었지만 변소는 변함이 없었다. 본채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밤에 가려고 하면 곤욕이었다. 달 밝은 밤이면 괜찮았지만 그믐날 밤에 그것도 석유램프가 없다면 자칫 똥통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뛰어서 갔고, 여름밤이면 반딧불이의 반짝임과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갔다. 시골집 변소는 마구간과 닭장을 겸하고 있어서 닭들의 고고고 하는 울음소리, 소의 되새김질 소리를 들으며 용변을 봤었다. 화장지는 당연히 없었고 신문지나 폐지 등이 통에 담겨 있었다. 일을 마치면 신문지를 비벼 부드럽게 해서 마무리했다. 간혹 너무 오래 비비면 종이가 약해져서 뒤를 닦다가 찢어지는 난관에 빠질 수도 있었다.
엄마의 시골살이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열 살 무렵 온 가족이 도시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아직 일반화되기 전이었고 중소도시여서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이사한 집은 단층 연립주택이었는데 서민이 살기에 꽤 좋은 집에 속했다. 하모니카처럼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같은 구조의 단독주택들이 마주 보고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옥상이 있는 평지붕 형태의 슬래브집이었다. 마당이 있고 화장실은 대문 옆에 따로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의 구조는 시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래로 변이 보이는 푸세식인데 나무판 대신 도기와 타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어 보다 깔끔하다는 것뿐이었다. 어린애들이 간혹 빠지기도 했다. 한 번 빠진 아이들은 암만 깨끗이 씻어도 그 냄새가 석 달 열흘을 간다는 얘기가 있었다. 화장실과 관계되는 기담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많이 떠돌았다.
텔레비전에서 전설의 고향이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 형제들은 마려워도 화장실을 가려하지 않았고 그럴 땐 엄마가 같이 가서 화장실 밖에 지켜 서 있어야 했다. 혹여 엄마가 보이지 않거나 살며시 들어갈라치면 변소에서 울부짖음이 들리곤 했다.
새집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었던 엄마는 그러나 시름시름 앓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오랜 투병생활을 접고 고통 없는 곳으로 영원히 떠나셨다. 긴 병에 효자 없어서인가 아니면 오래 이별을 준비해서였던가 나는 엄마를 보내고도 한동안 덤덤했다. 어린 우리를 돌보지도 않고 일찍 떠난 엄마가 미웠다. 문득 가슴속에 그리움이 차오르면 애써 외면하고 억눌렀다.
평소 말수가 없으셨던 아버지는 더 말이 없어졌고 잘못을 해도 별로 야단도 치지 않으셨다. 날카롭고 근엄하던 표정은 지워졌고 심지어는 온화하게 웃어주기까지 하셨다. 하지만 눈동자에 남은 쓸쓸한 빛은 숨길 수 없었다.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때가 많았지만 집에 계시는 대부분의 시간은 서예 연습에 몰두하셨다. 연습용 갱지가 떨어지면 내게 심부름을 시키곤 하셨다.
80년대 초반이 지나도 화장지는 아직 서민들에게까지 일상화되지 못했다. 대부분 변소는 재래식이었고 주기적으로 일명 ‘똥차’를 불러서 퍼냈다. 신문지가 주로 휴지 역할을 했다. 아버지의 서예 연습 덕분에 변소에는 붓글씨가 쓰인 갱지가 많이 쌓였다. 신문지는 몇 차례 비벼서 사용해야 했지만 서예용 갱지는 부드러워 한 번 말았다가 펴서 사용하면 적당했다.
화장실 뒤지통에 쌓이는 갱지에 처음엔 굵은 글자 한 두 개가 쓰여 있더니 날이 갈수록 차츰 글자가 작아지고 문장이 고르게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법 긴 문장이 정연하게 자리 잡은 종이가 화장실 통에 놓여 있었다. 꺼내서 읽어보니 검은 먹으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내려간 글씨들은 한 편의 시였다.
천천히 읽어가던 나는 가슴과 목이 뜨겁게 차올랐다. 무뚝뚝하고 완고하던 아버지가 좀체 드러내지 않던 속마음이 고스란히 읽혀서였다. 흐려진 눈에서 넘쳐흐른 눈물이 갱지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거부하고 억눌러 왔던 내 가슴의 빗장도 무너져 내렸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시는 조선시대 왕방연이 지은 것이었다. 세조 때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며 읊은 시였다고 한다.
나는 시가 적힌 갱지를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일어섰다. 하지만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던지 쥐가 난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아 두꺼비처럼 어기적거리며 변소 문을 나서야만 했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피가 돌고 점차 다리의 감각이 살아나면서 걷기가 수월해졌다. 가슴에 차올랐던 응어리도 조금씩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