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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친절

by 힉엣눙크

겨울 추위가 본격화되는 12월의 중순을 맞으면서 갑작스러운 한파가 우리 부서에 닥쳤다. 전 조직을 대상으로 실시한 올해 친절 모니터링에서 우리 부서가 꼴찌를 했다는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어느 집단에서든 누군가는 꼴찌를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속담을 들먹이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요즘 어디에서건 친절은 생존이니까. 부서원들은 전부 싸한 공기와 뒤숭숭한 마음으로 자신의 실수나 습관을 복기해 보는 듯했다. 한편으로 이런 결과를 초래한 주범이 누구일까 떠올려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일. 우리 모두는 자체 친절교육을 실시해야 했다. 매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친절강사가 되어 동료들을 교육한다는 것이다. 다음 주면 내 차례여서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불친절한 집단이 스스로 친절을 가르치고 교육한다는 것이 모순되고 자못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친절강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아비판이라도 해야 하나?


막막한 마음에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았다. 먼저 친절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표준 국어대사전에는 ”친절(親切) :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함. 또는 그런 태도“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친절의 한자어가 조금 이상했다. 예절, 범절 등과 같이 당연히 마디 절(節)자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자를 절(切)’자였다. 친할 친(親)자는 의미가 맞아 들어가는데 뜬금없이 ‘자를 절(切)’자라니. 도대체 무엇을 자른다는 말인가?


호기심에 친절의 어원을 좀 더 찾아보았다. 내용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친절’이라는 말이 일본 사무라이의 자결 방식인 할복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배를 갈라 자결을 하면 오랫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헤어나려 몸부림치는 과정이 극도로 비참해지게 된다. 그 고통의 시간과 비참함을 줄이기 위해 무사가 할복하면 뒤에 서 있던 카이샤쿠(介錯)가 바로 목을 베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보통 사무라이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 또는 친구가 하게 되는데 이렇게 할복하는 상대를 위해 ‘친히(親) 목을 베어주는(切) 자’에서 유래한 말이 친절이라는 것이다.


그 시절 사무라이 문화 속에서도 친한 사람의 목을 벤다는 것은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죽으려는 자의 고통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해서 어려운 임무를 맡아 준다는 것은 죽음의 강을 건너는 자를 위한 제일 큰 친절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친절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섬뜩하고 소름이 끼쳤다. 한편으로 친절이라는 말을 굳이 일본에서 유래한 단어를 써야만 했는지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은 오래전 친절을 내세우며 ‘고객 만족’을 외쳤고 조금 더 지나자 ‘고객 기절’, ‘고객 졸도’를 주장하더니 최근에는 ‘고객 사망’이라고 얘기한단다. 고객을 친절의 도가니에 빠뜨리자는 말이 이제 극한까지 이르렀다. 어원에 거의 근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고, 어렵고, 답답하고, 화나고, 슬프고, 궁금해하는 고객들의 고통을 신속히 없앰으로써 고객에게 최상의 친절을 베풉시다. 여러분! 오늘도 감동과 만족이라는 칼날로 고객의 고통을 뎅강 벱시다.”


동료들을 앞에 두고 따뜻하고 정겹게 사랑스러운 봄바람 같이 친절의 한자어를 설명하며 시작하려 했던 나의 친절 강의가 돌연 피가 낭자한 하드코어 스릴러로 확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다가 나는 바삐 고개를 저었다.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지만 친절은 태도이다. 자신의 태도가 평소 부드럽고 공손한 편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러한 사람은 드물다. 설사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급박하고 화가 치밀어오는 상황에서도 마음에 평정을 유지한 채 온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는 아마도 득도한 초인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은 외려 ‘사망에 이를 정도의’ 친절을 원하는 이 아이러니를.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갑과 을’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일테면 이런 것이었다. 목욕탕집 사장이 에어컨을 수리하려고 기사를 불렀다. 사장은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었다며 기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빨리 고쳐주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는 등 별별 트집을 잡으며 갑질을 해대는 것이었다. 한참 당하고 있던 수리기사는 갑자기 목욕을 해야겠다면서 손님으로 변신했다. 목욕탕 주인에게 왜 손님에게 친절하지 않느냐, 위생이 이게 뭐냐는 등 역으로 갑질의 복수를 하는 장면을 연출해서 폭소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요구받으며 끊임없이 고통 레벨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어느 학자가 얘기하듯이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느긋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는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군들 친절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만사는 모두를 여유롭게 놔두지 않는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그리고 스스로의 욕망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친절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친절한 품성을 타고나지도 않았고, 자라온 가정환경도 무뚝뚝했으며, 오랜 수련을 거쳐 무애의 경지에 이른 도인이 아니라면, 게다가 이것저것 스트레스가 높은 환경에 처했다면 그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고객들은 지금 당신이 화가 나 있는지, 몸이 아픈지, 슬픈지, 시스템이 고장 났는지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속사정을 깊이 헤아려 줄 만큼 여유롭지도 않다. 그저 자신이 최상의 서비스를 신속히 제공받기를 원할 뿐이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싶으면 허리춤에서 클레임이 장전된 리볼버 권총을 가차 없이 뽑아 들 준비를 한 채.


황야에는 무법자가 있듯이 고객들 중에도 고질들은 있게 마련이다. 총잡이들을 대비하는 신공은 단 하나 습관화이다. 현관문을 열 때 비밀번호를 누르는 사람들은 번호를 의식하면서 누르지 않는다. 무의식 중에 손가락이 먼저 누른다.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수영, 배드민턴, 골프, 피아노, 색소폰 등 우리가 접하는 운동이나 악기 연주들은 모두 반복된 노력을 통해 습득된다. 기본 동작의 무한반복을 통해 일정 수준의 기량에 올라설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무질서한 동작이나 소음에 머무를 뿐이다. 높은 수준에 오른 정상급 선수나 연주자들도 기본적인 동작이나 연습을 거의 매일 빼먹지 않는다 들었다. 몸이 기억하도록.


친절을 요구받는 직장의 구성원이라면(직업을 가진 모든 이들은) 운동을 배우듯 악기를 연주하듯 자신을 객관화해서 꾸준히 친절을 연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려면 연습뿐이다.)


이참에 나도 부족한 면을 가다듬고 매너리즘에 빠진 부분은 없는지 점검해 볼 일이다. 친절을 위해, 연주를 위해, 운동을 위해 첫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모든 계획과 목표들은 한갓 공상에 머물 것이기에 지금 당장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자.


나는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지긋이 올려본다. 입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눈이 그대로이니 다른 손가락으로 눈꼬리도 내려본다. 거울 속 내가 웃고 있다. 페르소나 속에서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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