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치인의 소설 쓰고 앉았네라는 답변이 한 동안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소설가들도 항의했을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곱씹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나도 잊고 있던 소설에 대한 추억들을 꺼내 봤었다.
소설.
소싯적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식사를 거른다던가 밤을 새우던가 할 정도로 책을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공부하러 간 도서관에서 공부는 않고 열람실을 들락날락하며 토지,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 삼국지 등 대하소설을 주야장천 읽긴 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나를 책벌레로 기억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때는 겉멋이 들어 3,400페이지 되는 책도 끼고 다니며 읽긴 했다. 물론 공부하기 싫어 도피처로 삼은 거지만 친구들은 알 턱이 없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고등학교 때만큼 공부하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책 보다 재밌는 게 더 많아서였던 것 같다. 전공서적과 신앙서적 외엔 소설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아이를 낳고 휴직을 하니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들이 무료하기도 했다. 집 옆 복지관에 다행히 자그마한 도서실이 있어 아이를 업고 종종 들러 재미난 소설책을 빌려보곤 했다.
아이가 점점 크면서 간혹 소설을 읽기도 했지만 예전처럼 푹 빠질 순 없었다. 감당해 낼 일상들이 만만치 않았기에 소설을 읽을 여유는 사치였다. 대신 닥치는 대로 자기 계발서와 실용서를 읽어댔다. 당장 읽고 당장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책들.
아이들 책을 읽어주다 보니 동화책도 제법 읽게 됐다. 어떤 건 나도 푹 빠져 단숨에 읽은 책도 있고, 어떤 건 기대보다 시시했다.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재미난 동화책을 골라 읽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초등교사로서, 엄마로서 자연스레 느끼는 흥미라 생각했다.
그런데 올 초 불현듯 꿈이 생겼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꿈.
막둥이를 키우며 시간은 더 없는데,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이 마음 깊이에서 솟아올랐다. 브런치 작가가 된 것도 꿈을 갖게 한 데에 한 몫했다. 내가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했으니.
학창 시절 글짓기 상을 서너 번 받아보기도 했고, 학보사, 문예부 활동을 하긴 했지만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을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불혹을 코 앞에 둔 지금, 신춘문예 당선의 꿈이 내게 새롭게 다가올 것은 무엇인가.
당장 소설을 써 보려 하니 쉽게 써지지 않는다. 소비자로서 대하던 소설을 생산자로 접근하니 안 그래도 복잡한 마음이 심란하다.
평소 좋아하던 박완서 작가의 소설 여러 권을 빌려 와 읽기 시작했다. 실용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소설에서 얻는 즐거움이란! 육아의 고단함을 잠시 잊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내가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어렵다. 이 필력, 글감. 나를 견주어보니 한없이 보잘것없어 보였다.
한 때 잠깐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소설이지만 작가의 생각과 삶이 육수처럼 기본재료가 되기에 소설을 통해 나를 보여주는 게 무서웠다. 나는 아직 감추고 싶은 것도 많고 그럴싸해 보이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지금도 그런 고민을 한다. 소설을 쓰는 건 그야말로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내 삶을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는가.
마흔에 등단했다는 박완서 선생님처럼 언젠가는 나도 마흔쯤 작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막연히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흔은 성큼 다가왔다.
이제는 결단을 해야겠다. 내 삶이 드러나는 것에 너무 겁먹지 말 것. 오히려 다른 사람을 살리는 약재료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꿈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