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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Dec 31. 2020

뜨거운 생각을 냉철한 기술로 옮긴다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가지라고 생각한다...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 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 조지 오웰, <나는  쓰는가 Why I Write>(1946)



1968년 8월. 여기 7명, 아니 8명의 열혈 운동가들이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시카고로 모여든다. 그들은 미정부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이를 위한 평화 시위와 연설을 각자 계획한다. 그들은 한 패가 아니다. 민주사회학생회(Leaders of the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 SDS)의 공동대표 톰 헤이든과 레니 데이비스, 청년국제당(the Youth International Party, Yippies)의 공동창립자 애비 호프먼과 제리 루빈, 전미월남전종전운동위원회(the Mobilization to End the War in Vietnam, The Mobe)의 공동대표 데이비드 델린저 그리고 흑표당(the Black Panther Party) 대표 바비 실 등. 그러나 평화 시위는 시위대와 군경찰 사이의 폭력 사태로 번지고, 정부는 이들 7명이 국가 안보 위협하려 서로 모의했다는 혐의로 그들을 고발한다.  


7분여만에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2020)은 경쾌한 호흡으로 1968년 8월 시위 직전까지의 피고인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각자의 상황이 빠르게 교차편집되면서 그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설명해낸다. 민주주의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가득한 대학생 톰 헤이든과 레니 데이비스, 자유로운 히피 문화를 내세우며 재치있는 입담으로 반전을 주장하는 애비 호프먼과 제리 루빈, 비폭력을 믿는 정직하고 성실한 데이비드 델린저, 저돌적이고 반항적인 바비 실. 여기에 비교적 비중이 적은 리 와이너와 존 프로인스까지 '우리 둘은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위계의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앉혀준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해'라는 재치 있는 대사를 주고받으며 이 복잡한 캐릭터 구성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영화는 유려한 솜씨로 드라마를 쌓아간다.

비록 대의는 비슷할지언정 '시카고 7' 그리고 바비 실의 조합은 그야말로 오월동주, 오합지졸, 동상이몽이다. 한 패로 묶여 함께 지리한 재판을 이어나가지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톰은 사사건건 판사에게 말대답하고 그를 조롱하며, 막무가내에 대마초에 찌들어있는 자유분방한 애비가 불안하고, 애비는 재판에서 잘 보이기 위해 머리를 새로 하는, 샌님 같고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는 톰이 못마땅하다. 바비는 피고인들을 한층 더 악당처럼 보이게 하려고 흑인인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며 분노한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리처드 슐츠 검사는 신입 법무장관으로부터 판례도 없는 악법-남부 백인과 미 의회가 흑인 운동가들의 표현권을 제한하려고 만든 랩 브라운 법-을 근거로 이들을 기소하라는 임무를 받아, '개인적으로는 피고인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이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근거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묵살당한 채, 어떻게든 그들이 중형을 받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은 컨슬러, 와인글래스 변호사는 부당한 재판에 계속 좌절을 겪으면서 사사건건 충돌하는 피고인들을 중재하느라 진이 빠진다.

특히 바비 실의 캐릭터는 이 영화가 고발하고자 하는 사건의 부당함을 한층 더 극대화한다. 그는 시카고에 단 4시간만 머물며 연설을 한 차례 했을 뿐인데도, '시카고 7'에조차 포함되지 못한 채 부당한 재판에 참여당한다. 그는 홀로 수감 상태이며(코네티컷에서의 경찰 살해 혐의로 인한 것으로, 이후 잘못된 기소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의 변호사가 건강상의 이유로 변호를 맡을 수 없게 되어 재판 연기를 신청했으나 판사는 이것을 기각하고서는 '변호인이 없으니 발언할 수 없다'라고 그를 다그친다. 덕분에 바비는 재판 내내 자신을 제대로 변호도 하지 못한 채, 판사에게 항의를 하다가 나중에는 재갈까지 물려진다. 바닥 밑에 지하가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판사와 정부가 모여주는 작태는 관객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사건을 담당하는 율리우스 호프먼 판사는 거의 이 영화의 절대악이다. 그가 피고인과 변호사의 이름을 계속 잘못 부르며 그들을 뼛속 깊이 무시하고, 자신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법정 모욕죄를 남발한다. 재판의 흐름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램지 클라크 전 법무장관의 증언을 배심원에게 제공하기를 거부하고, 거부했다는 내용조차 기록에서 삭제하도록 지시한다. 정부 또한 사건 조작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배심원 중 피고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배심원에게 흑표당의 협박 사건을 날조하여, 그들을 배심원단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극적인 연출의 재미 또한 결코 놓지 않는다. 영화는 긴장과 이완, 갈등과 조화를 반복하면서 일정 수준의 탄력을 만들어낸다. 일단 영화의 전개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라 자칫하다가는 영화의 내용을 놓치기 쉬워 절로 몰입이 된다. 등장인물이 굉장히 많은 편인데도, 캐릭터들이 개성을 잃지 않고 각자 맡은 역할을 다하며 서사를 충분히 표현해낸다. 오히려 그 복잡함이 영화에 풍성함을 부여한다. 또한 법정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성상 법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드라마가 전개되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과거 시점의 장면과, 실제 영상 기록물, 그리고 애비의 스탠드업을 함께 삽입하여 사건을 다각면으로 묘사한다. 예컨대 공원에서 벌어진 시위대와 경찰의 첫 무력 충돌은 평화 시위가 어떻게 폭동으로 진화했는지 고조되는 긴장을 훌륭하게 표현한다. 애비가 스탠드업에서 그 때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 때 시위대 중 한 명이 외쳤죠, 'take the hill!'" 빠른 템포의 흥겨운 음악이 삽입되면서 마치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4)의 교회 장면을 연상하게 할 정도의 흥겨움마저 주지만 현실은 경찰의 곤봉에 시위대가 무참히 폭행을 당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중간중간 삽입되는 애비의 스탠드업 무대는 해설의 역할을 맡아 서사를 채워주는 동시에 유머를 제공한다. 법정에서 절대악 호프먼 판사가 애비 호프먼과 자신은 혈연 관계가 없다고 말하자 '오, 아버지 왜 그러세요'라며 빈정대거나, 재판에 항의하는 의미로 법복 그리고 그 아래 또 경찰복을 입고 재판에 출두하는 식이다.  

(사실 에디 레드메인, 사샤 바론 코헨, 조셉 고든레빗, 존 캐롤 린치 그리고 마이클 키튼 등등으로 이어지는 온갖 명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영화적 쾌감은 차고 넘친다)




부당한 재판은 별다른 소득없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모두는 지쳐간다. 애비가 이건 정치적인 재판이라고 빈정거릴 때 그런 종류의 재판은 없다고 일갈하던 컨슬러 변호사는 이제 그것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아들에게 '폭력은 안 돼, 항상 정중한 태도를 보여야 해'라고 평화롭게 말하던 델린저조차 이성을 잃고 자신을 제지하던 경찰을 주먹으로 친다.

정부가 그들을 고발한 내용과 달리, '시카고 7' 중 그 누구도 폭동을 일으키길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는 순간순간 고조되는 군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들이 어떻게 초조하게 궁리했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1968년 8월의 진실-시위대와 경찰 중 누가 폭력 시위를 시작했는지-을 향해 가면서 톰과 애비는 마지막으로 첨예하게 갈등한다. 가장 세태에 부합하는 인물인줄 알았던 톰이 오히려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피를 흘릴 거면 시카고 전체에 흐르게 합시다! 길거리로 나가자!'라고 발언한 테이프가 증거물로 입수되면서 모두를 비롯해 애비는 절망에 빠진다. 문제의 밤이 애비의 코멘터리와 함께 펼쳐진다. 어느 한가로운 술집 앞에서 톰과 애비를 비롯한 주동자 무리는 경찰에 포위된다. 그들을 막다른 위치에 몰아넣은 경찰은 명찰과 배지를 제거하는 '소름돋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경찰이 먼저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술집의 유리창이 무참히 깨진다. 사실 톰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피를 흘릴 거면'이라는 의미였다. 이 부당함을 모두에게 보여주자는 뜻이었다. 애비는 그걸 깨닫고는 너는 늘 말을 불분명하게 한다면서 톰이 얼마나 뜨거운 결의로 이 일에 뛰어든건지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서로 동의할 수 없는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고, 그 공통의 가치관을 향해 결국 융화하게 된다.

재판 마지막 날, 피고인단의 마지막 발언자로 톰이 나서자 호프먼 판사는 그에게 '존중(respectful)과 반성(remorseful)을 담아 간단하고 명료한 발언을 들려준다면 형을 선고할 때 긍정적으로 반영하'겠다는 발언을 한다. 판사의 말을 되짚던 톰은 말한다.

이 재판이 시작된 이후로 미군 4,752명이 베트남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명단은 레니가 매일밤 손으로 적어내던 이름이었다.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도 이 일이 누굴 위한 건지 기억하'기 위해서. 톰은 국가와 법정에 대한 존중과 회한이 아닌, 전쟁으로 무의미하게 죽은 군인들에 대한 존중과 회한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가 내세우는 명분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정의와 애국을 그 이름들을 잊지 않고 하나하나에 부르는 것에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에 이르면 영화가 두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영리하게 쌓아온 감정들이 둑 무너지듯 넘치며 짜릿한 쾌감과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피고인단과 변호인뿐만 아니라 법정 방청객, 그리고 슐츠 판사조차 기립하여 환호성을 보내고 팔을 번쩍 들어올려 톰을 지지한다. 호프먼 판사가 당황하며 법봉을 마구 내려치지만 법정을 뒤덮은 뜨거운 환호성을 덮기에는 역부족일 뿐이다.  

'뭐하는 거야?' '고인에 대한 경의입니다.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죠.'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생각idea일 것이다.

증언대에 선 애비는 자신이 왜 이 재판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냐는 슐츠 검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특정 생각을 품고 주 경계를 넘어서요. 총기, 마약, 소녀가 아니라 생각idea을 반입했대요. 그 이유로 가스를 맞고, 구타를 당하고, 체포되어서 법정에 세워졌죠.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생각한 죄를 묻는 상황. 그것이 애비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또한 영화 중 톰은 애비가 이 숭고한 투쟁을 우습게 만들고 있다며 그를 맹비난하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너는 관심받는 데만 집중하니까..좋아, 내가 불만인 건, 앞으로 50년 동안은 사람들이 '진보 정치'라고 하면 널 떠올릴 거라는 거야. 너와 네 멍청한 추종자들이 병사들에게 꽃을 나눠주고 펜타곤 건물을 공중에 띄우려고 한 모습만을 떠올리겠지. 평등이나 정의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교육, 빈곤, 발전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약에 절어 방황하는 패배자들이 존중도 모른 채 험담과 불법을 일삼는 꼴을 떠올릴 거고 우린 선거에서 지겠지.

톰은 '50년 뒤에 우리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에 대해 애비에게 열변을 토하는데, 그 50년 뒤가 바로 지금 2020년이다. 그러니까 이 대사는 이 영화를 연출한 에론 소킨이 스스로에게 또 동시대인인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이다. 그는 영화 <어 퓨 굿 맨>, <머니볼>, <소셜 네트워크> 그리고 드라마 <웨스트윙>의 각본으로 유명한 각본가 겸 감독으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는 인물이다. 실제로 소킨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2016년 트럼프가 대선 유세장에서 자신에게 항의하는 시위대를 향해 '옛날 같았으면 저런 사람들은 들것에 실려나갔을 것'이라고 발언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link).


결국 이 영화는 실화에 대한 재기발랄한 재현이자 개인의 믿음에 대한 실현이다. 미국 민주주의 역사의 치부로 간주될 수 있는 재판 사건을 눈을 뗄 수 없는 솜씨로 쫄깃하게 표현해내면서도, 그 안에 자신이 믿는 정의를 날카롭게 담아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쿨하지만 또한 뜨겁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 소킨이라는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예술을 통해 성취하는가에 대한 결과물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억압하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라는 것을, 그런 일이 5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서 소킨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영화 <변호인>(2013)을 떠올리게 된다. 진실을 왜곡하려는 폭압적인 정부와 맞서 부당함에 항거하는 법정드라마라는 측면에서 두 영화는 매우 닮았다. 그래서 영화 <시카고..>를 보고 있노라면, 경쾌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 속에 절로 이런 문장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런 게 어딨어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밥벌이를 위해 체면 불구하고 마구 명함을 흩뿌리던 세금 전문 변호사조차 의문을 갖게하는, 결코 남일이 아니었던 이 세상의 부정.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The whole world is watching!". 비록 지금 이곳에서 정의가 실현되고 있지 못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는 엄중한 외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넓은 시야에서는 정의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순수한 열정. 이 사건을 영화화하고자 할 때 소킨의 생각은 이런 지점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세상 앞에 설득력 있게 펼쳐보이겠다는 예술적 야망이다. 결국 표현 이전에 생각이 있었다.


그렇기에 크레딧이 올라갈 때 삽입되는 음악은 소킨이 60년대 민주주의 운동가들에게 바치는 뜨거운 헌사이다.

Hear my voice
Hear my dreams
Let us make a world
In which we believe
In which we believe

 - Celeste, <Here my voice> from The Trial of the Chicago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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