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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과 은퇴는 삶의 인터미션일 뿐이다

by Lohengrin

작년 말 미국에서 개봉했지만 국내에는 2월 12일부터 상영을 시작한 영화가 있다. 브레디 코베 감독의 '브루르탈리스트(The Brutalist)'다. 2차 대전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건축가가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을 만들고자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골든글로브의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의 화려함보다는 상영시간이 무려 3시간 34분이나 되는 장편으로, 영화중간에 15분의 인터미션이 있다는데 더 눈길이 가는 영화다.


영화 상영 중간에 인터미션이 있는 영화는 흔치 않다. 물론 영상도구가 발달하기 전인 1960년대와 70년까지는 영화관에서 필름을 교체하는 시간 때문에 할 수 없이 인터미션 시간을 두었지만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는 인터미션이 있는 영화들은 아주 특별한 마케팅 요소로 활용되었다. 흥행과 수익의 손익계산서를 그리는데 영화 상영 길이는 주요 변수였기에, 정말 서사가 훌륭한 영화가 아니고서는 인터미션을 끼워 넣은 만큼의 3시간 넘는 대작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개봉한 브루탈리스트의 인터미션은, 감독이 아예 각본 집필할 때 염두에 둔 것으로, 인터미션 전과 후의 서사를 나누는 페이지로 활용했다는 점이 다르다. 인터미션이라고 아예 영화를 멈추고 조명을 켜는 것이 아니라 인터미션 자체가 영화에 포함되어 있어 영화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고 1시간 40분쯤 지날 무렵 스크린에 주인공의 예전 결혼식 사진이 올라오면서 휴식 알림과 함께 15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상영시간이 3시간이 넘는 근래의 대작으로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물의 시간'(3시간 12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3시간 1분)가 있지만 영화상영 중 인터미션은 없었다.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가 출연했던 2019년 작 '아이리시맨(The Irishman)'도 상영시간이 3시간 29분이 되었지만 인터미션은 없다. 영화에서 인터미션의 활용은 그만큼 특이한 사례라는 것이다.

인터미션.jpg 영화 브루탈리스트 인터미션 시간에 나오는 사진 및 시간

인터미션(幕間 ; intermisson)은 흔히 공연시간이 긴 오케스트라 연주나 오페라, 뮤지컬 등에서 중간에 짧은 휴식 시간을 줌으로써, 이어지는 뒷 공연이나 연주에 관객들이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다.


이 인터미션은 영화나 공연 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있어서도 필요하다. 3시간짜리에 집중하기 위해서도 인터미션이 필요한데 길게는 100년을 사는데 인터미션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아니 살면서 인터미션이 있음에도 그것이 인터미션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바쁜 월화수목금 평일을 보내고 꿀맛같이 다가오는 주말의 여유도 일주일 중의 인터미션이고 직장생활의 쫓김으로부터 해방되는 휴가가 또한 인터미션이다.


인터미션은 곧이어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와 그 시간을 준비하는 휴식이다.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앞으로 전개될 시간에 대한 유비무환의 준비다. 휴식시간이라고 그냥 맥없이 시간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인터미션 시간에 화장실에 가지 않더라도 그동안 휴대폰에 문자가 왔는지, 전화라도 왔는지 아니면 주식시세가 궁금해서라도 휴대폰을 검색한다. 인터미션의 시간은 그런 것이다. 시간을 주어보고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시간을 쓰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인터미션 시간의 전제는 다가올 시간에 반드시 무언가 할 것이 있고 해야 할 것이 있다. 이어서 봐야 할 공연이 있고 영화가 있다. 인터미션은 앞과의 연장선이자 미래의 연결선이다. 인터미션 이후에 이어질 것이 없거나 불투명하다면 그것은 인터미션이 아니다. 그냥 쭉 쉬는 것이다. 포기한 인생이 되어버린다.


정년퇴직과 은퇴도 마찬가지다. 인생 1막을 끝내고 2막으로 들어서는 기로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인터미션의 시간이다. 이 인터미션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내느냐가 곧 맞이할 인생 2막의 서막을 잘 열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인터미션의 시간은 각자마다 다르게 다가오고 다를 뿐이다.


살아봐야 알게 되는 게 인생이다. 삶에 간접 경험은 없다. 순간순간이 모두 경험치의 누적이다.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다 살게 되어 있다. 조급하게 사느냐, 내려놓고 여유 있게 사느냐 정도의 차이다. 잘 살았네 못 살았네의 비교가 아니고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만들고 거기에 만족하면 된다.


나에게 주어진 천금 같은 인생의 인터미션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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