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말 정년퇴직 이후 국가로부터 공식 실업자임을 인정받은 지가 벌써 4개월이 지났다. 11월에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12월에 실업인증 절차를 마치고, 270일 한시적 국가공무원(?) 신분으로 전환한 것이다. 어제는 한시적 국가공무원으로서 충실하게 임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러 간 날이다.
실업급여 대상자로 인정받아 급여 수령을 하게 되면, 네 번째 되는 달에는 의무적으로 관할 고용센터에 가서 담당자 면담을 통해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지 점검을 받고 확인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정수급을 방지하고 점검하기 위한 조치다.
고용센터를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의무출석일은 수급대상자들의 조건과 수급 기간에 따라 각기 다른데 만 60세 이상의 정년퇴직자들은 270일에 해당하는 총 9개월 중 절반의 기간인 4개월째 반드시 의무출석을 하여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머지 기간은 매달 실업인정 신청일에, 구직활동을 하거나 온라인 교육동영상 시청과 같은 구직 외 활동을 하고 이를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급여신청을 할 수 있다. 60세 이상 정년퇴직자에게는 그나마 온라인 강의만으로도 재취업활동 노력을 인정해 주는 아량이 있다. 다른 일반수급자나 장기, 반복수급자들은 반드시 한 달에 1-2회씩 구직활동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고용보험금을 납입한 대가로 실업급여를 받는 것이긴 하지만 철저히 관리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게 어제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오전 8시 반, 전철을 타고 노원역 근처에 있는 서울북부고용센터를 찾았다. 세상 참 좋아지고 행정절차가 잘 되어 있는 게, 미리미리 휴대폰으로 자세히 알려준다. 어디로 몇 시까지 와서 어느 창구로 오라고 말이다. 날짜를 까먹어서 못 갔네, 어디로 갈지 몰라서 안 갔네 등등 핑계를 댈 수가 없다. 휴대폰을 분실해서 못 봤다고 핑계대면 먹힐까?? 택도 없는 소리일 것이며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돈 주는데 안 받을 놈 없기 때문이다. 손바닥에 칼로 날짜를 새기더라도 기를 쓰고 날짜 맞춰 갈 것이다.
서울북부고용센터의 실업인정 창구는 3층에 있다. 도착하니 9시 10분이다. 9시부터 업무 시작이라 나름 맞춰갔다고 생각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내리는 순간, 워매~~ 3층 가득 사람들이 넘쳐난다. 어림잡아도 200여 명은 될 듯하다.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본다. 연배가 있음 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중간중간 젊은 사람들도 꽤 눈에 띄고 여성분들도 제법 있다. 참 다양한 사람들이 와있다는 것은 취업시장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대기 순번 번호표를 뽑니다. 대기순번 517번이다. 업무시작시간 지난 지 10분밖에 안 지난 이 아침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자기의 담당 창구가 정해져 있다. 아마도 수급자의 종류에 따라 창구가 정해지는 모양이다. 나에게 부여된 창구는 3번이다. 정년퇴직자 담당창구인 모양이다. 3번 창구의 대기자는 내 앞에 1명뿐이다. 오랜 시간 대기하고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이런 행운이 ~~
창구에 대기표와 신분증을 내밀고 담당자와 마주한다. "그 동한 구직활동 하시거나 취업해서 급여를 받으신 적 있으신가요?"라고 묻는다. "구직활동은 없었고 연말에 YTN 방송에 출연해서 출연료 받은 게 조금 있는데요. 지난달 온라인 신청할 때 금액이랑 신고했습니다"라고 이실직고했다. "이번 달도 동영상 강의 수강하시는 걸로 구직활동 대체하셨네요. 60세 이상 정년퇴직자 셔서 앞으로도 동영상 강의 수강으로 대체하셔도 가능합니다. 모든 확인절차 끝났습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렇게 실업인정 4차 의무 출석 확인을 마쳤다. 내일 정도면 네 번째 실업급여 184만 8천 원이 입금될 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3월에 들어서 경칩인데 웬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리던지. 우산도 없이 갔는데 눈을 못 뜰 정도로 눈이 내렸다. 전철역까지 걷는 5분여 동안,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어깨에 흰 눈을 짐처럼 지고 간다. 눈이 낭만이 아니고 재앙이 되어간다. 하얀색으로 덮어봐야 그저 감추는 것일 뿐인데 --- 본질을 가린다고 사라지지 않는데 --- 흰색의 단일화로 채색하는 것은 처음엔 예쁘고 멋있게 보이겠지만 결국 녹아내려 질척일 텐데 --- 차라리 깔끔하게 씻어가는 비로 내리면 좋을 텐데 ---
눈의 낭만을 잊은 것은 아닌지, 아니 내 마음이 쓸쓸해져 공허해지는 것은 아닌지, 눈발 속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해 본다. 전철역 플랫폼으로 내려와 벽에 걸린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본다. 하얗게 머리에 이고 있었던 눈은 방울방울 이슬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변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