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야기꾼일 수밖에 없다

by Lohengrin

‘호모 사피엔스는 이야기하는 존재다.’ 인류의 진화에서 결정적인 도약은 도구의 사용이나 직립 보행을 넘어서, 이야기하는 능력에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를 통해 세상의 의미를 직조하고, 이야기를 통해 존재의 형상을 부여했다.


세상만물은 이름을 얻고 서사를 부여받을 때 비로소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이야기가 없는 존재는 문맥 없는 문장처럼 낯설고 혼란스러우며, 이해받을 수도, 기억될 수도 없다.


이야기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의미의 조직이다. 이야기에는 맥락이 필요하다. 앞뒤가 맞아야 하며, 원인과 결과의 흐름이 존재해야 한다. 횡설수설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설득도 이해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인간은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세상을 설명할 때 반드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를 잘 짜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능력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을 넘어서, 인간 개개인의 지적 능력을 평가받는 기준이 된다. 말과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곧 생각이 명료하다는 증거이며, 알고 있는 정보를 체계화하고 정제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모든 예술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음악은 음표로, 미술은 색채와 형태로, 무용은 움직임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악장의 구성과 클라이맥스를 통해 이야기를 완성한다. 추상화라고 해서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생략하거나 변형한 스토리를 관객이 추론해 내며 감동을 느낀다. 노래 가사 또한 음률을 타고 귀에 꽂히는 하나의 이야기다. 예술은 감각적 표현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모두 서사의 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 전달의 방식은 인간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구조다.


과학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과학은 자연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구조화하는 체계다. 물리학은 우주의 구조와 움직임을 설명하고, 생물학은 생명의 기원을 추적하며, 지질학은 지구의 과거를 되짚는다. 숫자와 공식은 자연현상을 재현하는 언어이며, 이 또한 하나의 이야기 형식이다. 입자물리학에서 보듯, 우주의 미세한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뉴턴의 운동법칙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결국 세계에 관한 하나의 서사다. 과학은 자연에 깃든 이야기를 정제된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 역시 이야기다. 토인비는 역사가 사실의 기록에서 출발해 과학의 힘으로 그 사실을 규명하고, 마지막에 인문학적 통찰로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한다고 말했다. 즉, 역사란 기록-과학-인문을 관통하는 스토리의 과정이다. 사건 그 자체로서의 과거는 단지 과거일 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인식 속에 맥락화되고 의미화될 때 비로소 '역사'로 기능한다. 누가, 왜, 어떻게 그 일을 했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서사화함으로써 우리는 과거를 현재로 끌어온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이야기이고, 인간은 결국 이야기로 존재하는 생명체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고유한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다. 성공과 실패,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의 순간들이 흩어진 채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궤적을 이룰 때 의미를 갖는다. 단편적인 사건들을 구슬 꿰듯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때, 우리는 그것을 '내 인생'이라 부른다. 일기란 그래서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자신을 이야기로 엮는 작업이다. 매일의 사소한 감정, 생각, 만남들을 기록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타인과 소통할 준비를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생물의 정점에 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능력 이상의 것을 추구했다.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며, 세상을 서사화했다. 이야기는 기억을 남기고 공동체를 만들며 문화를 축적하게 했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협업을 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온 모든 기반에는 이야기의 힘이 있었다. 신화와 전설, 종교의 경전, 영웅의 일대기, 예언과 역사, 철학의 논증, 심지어 미래에 대한 계획까지 모두 스토리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나는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가?" 삶의 궤적을 기록하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다. 생각을 쓰고, 삶을 돌아보며,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존재를 서사화하는 창조 행위다. 언젠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 발자국을 되짚을 때, 적어놨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날을 위해 오늘도 한 문장씩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며, 인간됨의 본질이자 나를 드러내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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