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려면 차 있어야 한다

by Lohengrin

영화 '승부'는 단순한 바둑 이야기를 넘어, 인생이라는 보이지 않는 승부를 조명한다. 바둑은 단지 흑과 백의 돌을 주고받는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축소판이자, 인간사의 축도(縮圖)다. 그 안에는 삶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시작과 끝, 이기고 지는 것, 직관과 전략, 감정과 이성, 도약과 후퇴, 그리고 고독과 통찰, 심지어 꼼수와 호구까지 등장하여 명멸한다. 그래서 바둑은 사람을 중독시킨다. 그 안에는 단순히 도파민의 작용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열망, ‘이기고 싶다’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체스나 장기, 바둑은 ‘결과’가 명확한 게임이다. 무승부도 있지만, 대체로 이기거나 지는 승부다. 이 명확함은 게임의 가장 매혹적인 요소이자, 삶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삶은 언제나 중간에 걸쳐 있고, 이겼는지 졌는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회색 지대가 많다. 그러나 바둑판 위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 모든 수가 기록되고 해석되고 되짚어지며, 그에 따라 평판도 운명도 결정된다. 이토록 투명하고 명확한 세계에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삶이 주지 못한 정의와 결과의 쾌감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둑의 실력은 단순한 숫자 단위가 아닌 비유적 의미를 내포한다. 아마추어는 30급부터 시작해서 1급, 그다음 프로 입단을 거쳐 1단부터 9단까지 올라간다. 이 중 프로 단수에는 각 단계를 설명하는 고유한 명칭이 부여되어 있다. 1단 수졸(守拙)은 ‘서툴음을 지키는 자’다. 이때는 배움의 시작으로, 자신이 어설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2단 약우(若愚)는 ‘어리석음을 닮은 자’다. 겸허함과 인내를 배우는 시기다. 지혜로 보이는 것들은 실제로는 무지의 얼굴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3단 투력(鬪力)은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시기다. 여기서부터 경쟁이 시작된다. 4단 소교(小巧)는 기술을 부릴 수 있는 시기고, 5단 용지(用智)는 전체를 바라보며 전략을 짜기 시작하는 단계다. 6단 통유(通幽)는 ‘감추어진 것을 꿰뚫어 보는 자’다. 단순한 기술이나 전술을 넘어서 바둑의 이치를 깨달아내는 자,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7단 구체(具體), 8단 좌조(坐照), 9단 입신(入神)으로 이어지면서 바둑은 인간의 정신세계와 통찰에까지 닿는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띄는 단계는 단연 6단, ‘통유(通幽)’다. ‘幽’는 어둡고 깊은 것을 의미한다. ‘通’은 그것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다. 즉, 통유란 단지 많이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본질과 이치를 직관하고 이해하는 상태다.

사람들은 자주 ‘비워야 채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무엇이 비어 있고, 무엇이 차 있는지를 모른다면 비울 수도, 채울 수도 없다. 알지도 못한 채 비워버리면, 그건 정리도 아니고 성장도 아니다. 물이 담긴 그릇을 덜어내려면, 먼저 물이 차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느 정도가 넘치는지, 무엇을 줄여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비움의 전제는 자각된 충만이다. 이 충만이 바로 ‘지식의 채움’이다.


하지만 이 채움도 단순하지 않다. 인간의 지식 창고는 밑 빠진 독과 같다. 아무리 지식을 넣어도 끝이 없다. 바둑처럼 계속 수를 두어도 완벽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깨진 독을 메우기 위한 두꺼비가 필요하다. 이 두꺼비는 질문이자 탐구이며, 끝없는 학습의 집요함이다. 덕분에 우리는 겨우겨우 조금씩 채워나간다. 그 끝없는 반복 속에서, 어렴풋이 통유의 경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은 ‘무엇이든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이 생긴다’는 의미다. 이 개념은 단순한 순환의 법칙이 아니라, 극한의 통과의례에 가깝다. 승부에서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포기해서는 알 수 없다. 마지막 한 수를 둘 때까지 포기하지 않은 자만이 진정한 반전을 경험한다.


통유의 경지는 여기서 출발한다. 지식의 끝, 고통의 끝, 탐구의 끝, 외로움의 끝에서 세상의 흐름과 본질을 꿰뚫어 보는 순간이 온다. 이때 비로소 세상은 명확해진다. 흑과 백이 뒤섞이더라도, 그 경계가 뚜렷해진다. 통유란 단지 공부 잘하거나 머리 좋은 상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집념, 끝까지 가보려는 인내, 승부의 끝에서 허무를 초월하려는 통찰의 시작이다.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생은 언제나 ‘승부’다. 생존을 건 경쟁이고, 의미를 향한 도전이며, 하루하루 던지는 수(手)다. 오늘의 한 수가 내일의 결과로 이어지고, 그 한 수가 잘못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시간이 지난 뒤다. 바둑과 삶이 닮았다는 말은 그래서 맞는 말이다. 이기거나 지는 것. 그 명확함과 냉정함. 우리는 그것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성장한다. ‘이기거나 지는 것’은 사실 외부 평가가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얼마나 노력했는가, 얼마나 도달했는가를 따지는 문제다. 바둑판 위에서는 그 모든 것이 기록된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결국 어딘가에 기록되고, 해석되며, 평가된다.


승부는 단지 바둑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통유의 이야기이고, 결국 우리의 이야기다. 통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의 여러 장면 속에 존재한다. 누군가의 말속에서, 어떤 책의 문장 속에서, 또는 한밤중 고민 끝에 도달한 깨달음 속에 숨어 있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계속 두어야 한다. 이기고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통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모든 수가 연결되어 있었음을 깨닫고, 그 연결 속에서 진짜 자신의 승부를 시작하게 된다.


기상관측이래 가장 더운 여름이 될 거라고 하지만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일 수 있다. 기후온난화로 매년 더워질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가장 시원한 여름을 즐겨야 한다. 더 더워지기 전에 말이다. 통유는 이렇게 반전의 긍정을 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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